조선대목구가 설정되고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가 조선에 입국해 조선교회 사목에 적극 뛰어들면서 교회는 신유박해 이전보다도 크게 성장했다. 물론 박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비교적 심하지 않았기에 신자들은 다시 신앙생활을 회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839년 기해년 다시 거센 박해가 시작됐다. 기해박해였다.
■ 다시 휘몰아친 박해
성 앵베르 주교, 성 민극가(스테파노), 성 정화경(안드레아), 하느님의 종 손경서(안드레아). 요당리성지 순교자 묘역에 있는 묘비들에 적힌 이름 중 기해박해에 순교한 이들이다.
기해박해 당시 손경서, 민극가 등은 앵베르 주교를 이곳에 피신시켰지만, 앵베르 주교는 신자들이 더 이상 희생되지 않도록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가 잡혔다. 기해박해가 일어나던 당시 조선교회는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박해는 다소 수그러들었고, 그 사이에 신자들의 청원과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헌신으로 조선대목구가 세워졌다.
조선 입국에 성공한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은 서울과 서울 인근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선교를 펼쳤다. 교우촌마다 회장을 임명하고, 주일과 축일을 지내는 법을 비롯해 세례·장례·혼인 등에 관한 규칙을 정해줘 신자들의 모임이 체계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도왔다.
이런 선교사들의 활약으로 6000명가량이었던 신자가 1838년 말에는 9000여 명으로 늘었고, 1839년 선교사들이 체포되기 전 교황청 포교성성(지금의 복음화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신자 수는 약 1만여 명에 달했다. 당시 조선인 1000명에 1명꼴로 신자였던 셈이다.
무엇보다 선교사들은 조선교회의 자립을 위해 조선인 사제 양성에 힘썼다. 모방 신부는 3명의 소년을 마카오 신학교로 보냈고, 앵베르 주교도 신학생 4명을 선발해 이중 2명을 서품할 계획으로 신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나 1839년 4월 18일 대대적인 박해를 선포하는 「사학토치령」이 반포되면서 조선교회에 다시 폭풍이 휘몰아쳤다.
기해박해는 천주교를 적대시하던 이지연이 우의정이 되어 엄격한 박해를 추진할 것을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기해박해가 시작되기 전에도 서울 곳곳에서는 신자들이 체포되는 등 박해는 있었지만, 당시 형조는 가능한 극형은 피하고자 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학토치령」 반포 이후 박해는 다시 혹독해졌다.
같은 해 11월 23일 「척사윤음」이 반포되면서 7개월여 만에 기해박해는 일단락됐지만, 그 영향은 컸다. 정부가 박해 종식을 선언한 것은 이미 대부분의 대표적인 신자들을 체포·처형했다고 판단하고 더 이상 대대적인 박해를 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 것이기 때문이다. 신유박해만큼 많은 수는 아니었지만, 103위 성인 중 70위가 기해박해 순교자일 정도로 많은 이들이 순교한 박해였다.
■ 「상재상서」와 「기해일기」
기해박해 중 작성된 주목할 만한 문헌은 성 정하상(바오로)의 「상재상서」와 앵베르 주교와 여러 신자들이 쓴 「기해일기」다.
정하상은 20년이 넘도록 중국을 오가며 성직자영입에 앞장선 교회 지도자로, 앵베르 주교가 입국한 이후로는 앵베르 주교를 보필했고, 신학생으로 선발돼 앵베르 주교에게 라틴어와 신학을 배우고 있었다. 기해박해가 시작되자 정하상은 순교를 결심하고 박해자들에게 전할 글을 작성했는데, 이것이 「상재상서」다. 정하상은 1839년 7월 11일 체포될 당시 미리 작성해 둔 「상재상서」를 제출했다.
‘상재상서’(上宰相書)란 재상, 즉 국왕을 보필하는 가장 높은 관료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의미다. 정하상은 이 글을 통해 “천주교에 대해서는 애당초 그 도리를 묻지도 않고 바르지 못한 도리로 판단했다”며 유교적 이념에 따르는 나라라면 천주교의 도리를 헤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박해자들이 주장하는 천주교에 대한 비판을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천주교 신자 체포를 그만두고 옥에 갇힌 억울한 사람들을 놓아주어 나라의 모든 백성이 평안히 생업을 누리게 해주길 바란다”며 호소했다.
「상재상서」는 한국교회 최초의 호교론서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 한국교회 초기 신자들이 신앙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조선 사람들에게 신앙이 어떻게 전교됐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기도 하다.
기해박해에 성인이 많이 탄생한 것은 「기해일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앵베르 주교는 1838년 말부터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하며 ‘1839년 조선 서울에서 일어난 박해에 관한 보고’를 작성했다. 앵베르 주교는 이 보고서를 마치기 전에 자신이 체포될 것을 예상하고 정하상을 비롯해 성 현경련(베네딕타), 성 현석문(가롤로), 성 이문우(요한), 최영수(필립보) 등 여러 신자들에게 순교자들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정리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기해박해로 앵베르 주교와 그에게 지시를 받은 이들이 순교하고 현석문만 남았고, 현석문은 그동안 여러 신자들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보완작업을 이어나가 마침내 1841년 기해박해의 순교자전인 「기해일기」를 완성했다.
이후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가 「기해일기」를 검토하고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와 현석문 등의 전기까지 추가해 「1839년과 1846년에 순교한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을 완성할 수 있었다. 이 행적은 후에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라틴어로 번역했다.
박해가 이어지면서 「기해일기」 원본은 소실 됐고, 필사로 전해진 사본만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기해일기」를 통해 전해진 자료들은 정확한 순교 행적을 담고 있어 시복·시성 재판에 결정적인 자료가 될 수 있었다. 또한 한글로 작성된 「기해일기」는 후대 신자들이 필사로 전해가며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고 신심을 북돋게 해주는 역할을 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