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를 시작으로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은 박해를 무릅쓰고 조선교회 사목에 뛰어들었다. 선교사들은 조선 신자들을 위해 다양한 사목을 펼쳤는데, 선교사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활동 중 하나가 ‘조선인 사제’ 양성이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 중 가장 먼저 조선에 입국한 성 모방(베드로) 신부는 조선인 사제 양성을 위해 세 명의 신학생을 선발했다.
파리 외방 전교회의 현지인 사제 양성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은이로 182 은이성지. 이곳은 박해시대 신자들이 모여살던 은이 교우촌의 공소가 있던 자리다. 은이공소터로 추정되는 자리에는 철판으로 된 조형물이 서 있다. 조형물에는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소년시절 모방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 형상이 담겨져 있다.
1836년 1월 15일 서울에 도착한 모방 신부는 경기도, 충청도의 교우촌을 방문하며 사목활동을 펼치는 한편, 신학생을 선발하고자 지도층 신자들에게 사제가 될 소양을 지닌 소년들을 추천하도록 했다. 그러던 중 은이를 방문한 모방 신부는 김대건에게 세례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했다.
이렇게 신학생을 선발한 것은 모방 신부의 개인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조선대목구를 맡았던 파리 외방 전교회가 현지인 사제를 양성하는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파리 외방 전교회 회칙은 “방인 성직자단이 형성되고, 선교사들의 협력 없이 자립적으로 운영되면 흔쾌히 모든 시설을 방인사제들에게 넘기고 물러나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선교방식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17세기 무렵까지 해외선교는 주로 수도회들이 담당했는데, 수도회들은 현지에 수도원을 세우는 방식으로 선교를 해나갔다. 이 방식은 각 수도원의 정통 영성을 전하고, 본원을 통해 선교사를 파견하고 지원하는 데는 유리했지만, 복음의 토착화나 선교지에 교계제도를 정착시키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다. 파리 외방 전교회는 조선인 사제를 양성함으로써 조선교회가 자립할 수 있다고 여겼고, 이를 위해 신학생 양성에 힘을 쏟았다.
꼴찌 신학생
우리는 김대건을 ‘조선의 첫 사제’로 기억하지만, 김대건은 모방 신부가 선발한 신학생 중 마지막으로 선발된 신학생이었고, 평가에서도 늘 꼴찌를 면치 못했다.
모방 신부는 처음에는 최양업과 최방제만을 마카오로 보내고 김대건은 나중에 보내려 생각하기도 했다. 김대건이 뒤늦게 선발된 탓에 라틴어 등 기초학업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해가 지속되는 조선교회의 상황에서 앞으로 마카오로 보낼 기회가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함께 보내기로 결정했다.
시작부터 늦었던 김대건은 그를 가르치던 신부들이 “사제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염려할 정도로 세 신학생 중 가장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
매스트르 신부는 김대건에 대해 “문체가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고 또 어떤 때는 상당히 잘 쓰지 못한다”고 평가하고, 또 성격 면에서도 “자주적이고 경솔하며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고 지적했다. 신심이 깊고 실력이 우수해 모든 스승 신부들이 기대를 걸던 최방제와 판단력이 우수하다는 칭찬을 듣던 최양업과는 비교가 되는 평가다.
게다가 김대건은 마카오로 떠나던 당시부터 8년가량을 늘 두통과 복통에 시달리며 지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낯빛이 좋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도 하얗고 노랗게 변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스승 신부들은 건강한 몸으로도 수행하기 힘든, 박해 중인 조선 선교를 김대건이 할 수 있을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째가 된 꼴찌
이렇게 뒤처지던 ‘꼴찌’ 김대건이었지만, 김대건이 낙담했거나 포기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피나는 노력으로 자신을 갈고 닦아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가장 먼저 사제품을 받은 조선의 첫 사제가 됐다.
라틴어 실력이 뒤처져 지적을 받던 김대건은 후에는 라틴어만이 아니라 프랑스어와 중국어도 구사할 정도로 언어공부를 이어나갔다. 이 언어공부 덕분에 1842년 프랑스함대 에리곤호에 매스트르 신부와 함께 통역관 자격으로 승선할 수 있었다. 이때 에리곤호 의사가 처방한 약이 김대건에게 크게 효과를 나타내 김대건을 늘 괴롭히던 건강문제도 해결됐다.
또 김대건은 ‘자주적이고 경솔하다’고 지적받던 성격을 ‘용기’로 승화시켰고, 이를 통해 바닷길을 통한 조선 입국을 성공시켰다.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해 서울에 선교거점을 마련하고, 배를 통해 다시 중국으로 입국했다.
신학생 시절 김대건을 염려해오던 매스트르 신부는 이 사건을 두고 “그는 자주성과 경솔성에도 불구하고 헌신의 확실한 표를 보였다”며 “중국으로 주교를 영입하러 오기 위해 미지의 항해에서 모든 위험을 무릅씀으로써 조선 포교에 큰 봉사를 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김대건을 바라보는 조선 관료들의 태도에서도 김대건이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조선의 고관대작들은 김대건을 대단한 학자로 여겼다. 실제로 김대건은 신학과 철학, 언어능력뿐 아니라 지리학, 항해술 등에도 조예가 깊었다. 이에 조선의 대신들은 옥중의 김대건에게 세계지도의 번역과 지리개설서 편찬 작업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시 김대건의 나이는 25세. 꼴찌 신학생으로 조선을 떠난 지 1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