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 수리산성지는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이 일군 교우촌이자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이다. 최경환 성인은 많은 면에서 모범적인 신앙 활동을 해왔는데,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자녀가 사제가 될 수 있도록 깊은 신앙을 물려준 것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아들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자 수리산으로 이주해 정착했다.부모에게 물려받은 깊은 신앙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은 1787년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 최한일이 하느님의 종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교리를 배우면서 시작됐다. 최양업 신부의 집안은 박해를 피해 삶의 터전과 재산까지도 버리고 살아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신앙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그 신앙을 다시 회복시킨 것이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었다.
최경환 성인은 가족들이 신앙에 냉담해지자 가족들을 회유했다. 하지만 가족들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편지를 남기고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곳으로 떠났다. 이 일을 계기로 최경환 성인 일가가 다시 신앙에 열심해졌는데, 이때 최양업 신부는 12살 무렵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최경환 성인의 첫째 아들로서 신앙을 위해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가난하고 험난한 삶을 받아들인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성장했다.
최양업 신부는 특별히 아버지 최경환 성인에게서 모범적인 신앙인의 모습을 배웠다. 최경환 성인은 일할 때나 대화할 때 항상 교리와 신앙에 관한 것만 이야기했고, 형제들과 화목하며 부모를 섬기며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최양업 신부는 후에 최경환 성인에 대해 “얼마나 꾸밈없이 순박하게 그리고 몸짓을 해 가면서 말하는지, 듣는 사람은 누구나 탄복했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그의 열정은 이웃에 대한 애틋한 동정심과 결합돼 있었다”고 회고한다.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 복자 이성례(마리아)는 최양업 신부와 그 형제들의 교리 선생님이었다. 이성례 복자는 최양업 신부의 가족이 충청도에서 서울로, 강원도로, 경기도로 이주하던 중에는 이집트로 피난하던 성가정의 이야기를, 먼 길에 굶주리고 지쳤을 때는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녀들을 가르쳤다. 최양업 신부는 이성례 복자가 “아들들에게 구원에 유익한 말과 모범으로 천주교 교리와 기도문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최경환 성인과 이성례 복자의 이런 신앙 전수는 최양업 신부에게 깊은 신앙심을 물려줬다. 이런 최양업 신부이기에 성 모방(베드로) 신부가 신학생을 선발하던 당시 가장 먼저 추천받을 수 있었다.
성실하고 촉망받는 인재
최양업 신부는 1836년 2월 6일 서울 후동에 있는 모방 신부의 거처에서 라틴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3월 14일 최방제(프란치스코)가, 7월 11일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모방 신부의 거처에 도착했다. 가장 먼저 뽑혀 신학 공부를 시작한 최양업 신부는 유학길을 떠나서도 촉망받는 신학생이었다.
최양업 신부의 스승들은 그를 높이 평가했다. 리브와 신부는 1842년 4월 파리 외방 전교회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브뤼니에르(Bruniere) 신부는 이 학생에게서 많은 재능, 무엇보다도 좋은 판단력을 발견했다고 한다”며 “그래서 브뤼니에르 신부는 그를 가르치기에 아주 적절한 학생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양업 신부는 비교적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는 학업에 있어서 만큼은 적극적이었다. 리브와 신부는 1839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학에 관해 최양업 신부와 김대건 신부가 자신의 주장을 펼치자 이들을 납득시키는 토론과정에서 애를 먹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이런 과정이 불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확신하다”고 소감을 남겼다.
또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차분한 성품을 바탕으로 철학과 신학뿐 아니라 다방면의 기량을 갈고 닦아나갔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어학이다. 김대건 신부도 라틴어, 프랑스어, 중국어 등을 구사하고 조선 관료들에게 큰 학자로 여겨질 정도로 지식을 쌓았지만, 최양업 신부의 성취는 그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842년 김대건 신부가 보낸 편지를 보면 파리 외방 전교회가 조선인 신학생들이 신학 공부에 집중하도록 프랑스어 교육을 중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때 최양업 신부는 프랑스어책을 읽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스승들은 최양업 신부가 프랑스어책을 읽더라도 신학 공부에 지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어학능력을 발휘해 1847년에는 페레올 주교가 작성한 ‘기해·병오박해 순교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번역했다. 라틴어로 번역된 이 문서는 교황청으로 보내졌고, 이 자료에 기록된 82명은 1857년 모두 가경자로 선포됐다.
또 최양업 신부는 성 베르뇌 시메온 주교가 추진한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 번역작업에도 참여했다. 중국어, 즉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한 「천주성교공과」와 「성교요리문답」은 각각 100여 년과 70여 년 동안 한국교회의 공식 기도서와 교리서로 쓰였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었고, 이를 잘 키워나간 것으로 보인다. 최양업 신부를 비롯한 조선 신학생들은 칼르리 신부에게 음악 지식을 배웠다. 최양업 신부가 이 수업을 통해 어느 정도 음악을 익혔는지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후 신부가 돼 사목하던 1858년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여러 개의 건반이 달린 풍금을 요청한 것으로 봤을 때, 최양업 신부는 악기를 사목에 활용할 만큼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런 지식은 훗날 최양업 신부가 ‘천주가사’를 지어 신자들이 쉽게 교리를 익힐 수 있도록 돕는 밑거름이 될 수 있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