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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5)] 죽산성지 : 병인박해의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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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명의 선교사들이 순교하면서 병인박해는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그해로 끝나지 않고 수년간 이어지면서 전국에서 8000명 이상의 신자들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박해로 변모했다. 왜 병인박해는 이토록 가혹한 박해로 확대됐을까.


 

■ 병인양요

 

 

경기 안성시 죽산면사무소 앞에 있는 순교자 현양비는 많은 신자가 희생된 병인박해를 기억하게 해준다. 죽산 도호부는 지금의 안성시 죽산면·일죽면·삼죽면과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백암면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한 행정기관이었다. 교우촌이 다수 형성됐던 지역을 관할했던 만큼, 많은 신자가 이곳으로 잡혀 들어왔고, 이곳에서 약 4km가량 떨어진 현 죽산성지 자리에서 순교했다.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는 1873년 말이 돼서야 끝을 맺게 된다. 1866년에 선교사들과 수많은 지도급 신자를 처형하면서 한 차례 소강상태가 되지만, 오히려 그 이후 더 많은 신자가 순교하게 된다. 죽산성지도 그런 순교지 중 하나다.

 

 

이렇게 박해가 거세진 계기는 프랑스군의 조선 침공, 바로 병인양요의 영향이 컸다. 병인양요는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한 일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병인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는 프랑스 극동 함대가 있는 중국 톈진으로 가서 선교사들의 처형 소식을 전하고, 남은 선교사들과 조선인 신자들의 구출을 요청했다. 이에 극동 함대 로즈 사령관은 이 사실을 본국과 베이징 주재 프랑스 공사 대리에게 알렸고 조선 출정을 계획했다.

 

 

프랑스군은 9월 정찰을 위해 원정을 나서 한강 양화진, 서강까지 전진했다가 철수했고, 이어 10월 본격적인 침공에 나섰다. 프랑스 함대에는 리델 신부와 통역으로 조선인 신자들이 동행했다.

 

 

프랑스군은 10월 14일 강화의 갑곶진에 상륙, 강화부를 점령했다. 한강 하류를 막아 서울에 물자가 들어가지 못하게 막으면 조선 정부가 굴복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프랑스군은 강화도 내에 있는 주요 방어진지를 무너뜨리고 불을 질러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정족산성에서 조선군의 기습으로 전투에 패배하자 로즈 사령관은 퇴각하기로 결정하고 11월 11일 떠났다.

 

 

프랑스군이 물러가자 박해가 더욱 심해져 전국 각지에서 많은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대원군을 비롯한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거슬러 올라온 것이나 강화도를 침략한 것은 천주교 신자들이 내통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특히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 의해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병인양요에 대한 책임을 묻고 프랑스와 내통하는 것에 대한 경각심을 주고자 양화진에서 신자들을 처형했다. 이곳이 오늘날 절두산순교성지다.


 

 

■ 덕산 사건과 신미양요

 

 

병인양요로 박해가 가열된 가운데 또 외국에 의한 사건이 발생했다. 1868년 5월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충청도 덕산에서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치려 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오페르트는 1866년 2차례에 걸쳐 조선에 통상 제안했다가 실패했다. 그러던 중 그는 중국에서 페롱 신부와 조선 신자들에게 “남연군의 묘에 있는 부장품으로 대원군과 협상하면 통상이 가능할 것”이라는 제안을 받고 1868년 5월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봉분을 파내고, 석회층을 제거하는데 예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자 작업을 중지하고 도주했다.

 

 

덕산 사건은 박해에 더욱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 충효를 근본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 무덤을 훼손한 사건은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도굴 시도를 보고받은 고종은 “바다 밖의 서양 놈들이 어떻게 길을 알아서 거침없이 쳐들어왔겠느냐”며 “필시 우리나라의 간사한 물리들 가운데 그들을 부추기고 길을 인도한 자가 있었을 것”이라며 분노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서양 사람들이 일으킨 변란은 조선 사람들이 호응한 결과라고 하면서 신자들을 모두 잡아 처형할 것을 강조했다.

 

 

1866년에 체포됐다가 배교한 피영록의 증언에 따르면 “교우가 잡혀 배교하면 놓아주는 법인데, 덕산 사건 후에는 잡히면 배교하건 아니건 죽였다”고 한다. 실제로 1866~1879년 체포된 신자 수의 기록을 살피면 1868년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죽산에서 순교한 복자 박 프란치스코·오 마르가리타 부부도 1868년 9월 순교했다.

 

 

덕산 사건 3년 후인 1871년에는 신미양요가 발생했다. 신미양요는 미국함대가 조선을 침공한 사건이다. 대동강에서 불에 타 침몰한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통상 조약을 요구하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원군은 미국의 불법 침략을 문제 삼고 교섭을 거절했다. 미국의 아시아 함대사령관 로저스는 강화도 초지진을 시작으로 덕진진, 광성진을 공격, 점령했으나 결사 저항하는 조선의 항전에 결국 철수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갑곶 나루터 등지에서 여러 신자들이 체포돼 순교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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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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