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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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의 순교자 발자취 따라 가경자 시복 시성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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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5일은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선종 163주기이다. 주교회의(의장 이용훈 마티아 주교)는 올해부터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을 ‘전구 기도의 날’로 지내기로 정하고,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위해 전구 기도를 바치자고 권고했다. 전구 기도의 날을 맞아 최양업 신부를 기억할 수 있는 순례지들을 방문해 보면 어떨까. 교구 내 최양업 신부 관련 순례지들을 소개한다.


■ 수리산성지 - 아버지 최경환 성인이 만든 교우촌 


수리산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아버지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이 이주해 교우촌을 형성한 곳이자, 최경환의 묘소가 있는 곳이다.


충남 청양군 농암리 다락골에 살던 최경환의 가족은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 신앙생활을 하기 좋은 서울 벙거지골로 이주했다. 그러나 박해가 심해지자, 강원도와 경기도 내 곳곳을 전전하다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선발돼 유학길에 오를 무렵, 수리산에 정착했다.


최경환이 이곳에 정착하자 여러 신자들도 함께 수리산에 모이기 시작하면서 교우촌이 형성됐다. 최경환은 교우촌 회장을 맡으면서 신자들과 함께 담배를 재배하며 생계를 꾸리고, 활발한 선교활동과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최경환은 흉년이 들면 주변에 사는 가난한 이들을 백방으로 도와주고, 과일을 추수할 때가 되면 가장 좋은 것을 골라 이웃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눴다. 뿐만 아니라 남들이 탄복할 만큼 형제들과 화목하게 살았고, 어머니에 대해서는 가장 다정한 효도로 섬겼으며,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도 자상하게 보살펴 주었으며,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바쁜 날이라도 신심 독서를 중단하지 않았고, 아침·저녁기도를 가족 모두와 함께했다고 한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포졸들이 수리산을 찾아 40여 명의 신자들을 체포했다. 당시 최경환의 아내 복자 이성례(마리아)는 포졸들에게 줄 밥상을 차리고 최경환은 포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고 한다. 붙잡힌 최경환은 모진 고문 끝에 1839년 9월 12일 옥사로, 이성례는 1840년 1월 31일 당고개에서 참수로 순교했다.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수리산을 방문할 때마다 최경환의 묘소에서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병목안로 408


■ 손골성지 - 선교사들과 공감하며 긴밀히 친교


손골성지는 박해시기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성지로, 최양업 신부도 선교사들과 함께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손골에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 무렵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이 교우촌은 당시 조선에 파견되던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이 조선의 문화와 환경에 적응하고 선교준비를 하도록 돕는 역할을 했다. 성 다블뤼 주교를 비롯해 성 도리 헨리코 신부, 성 오메트르 베드로 신부 등 많은 선교사들이 손골을 거쳤다.


선교사들이 상주하고 있던 만큼, 사목의 중심지기도 했다. 성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4곳을 사목하라”고 명했고, 오메트르 신부는 손골을 중심으로 미리내, 무량골, 소내실 등 교우촌을 사목했다.



손골은 파리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과 긴밀한 친교를 이루던 최양업 신부도 머물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는 조선 입국 후 손골에 묵고 있던 페롱 신부를 만나 조선에서 사목활동을 펼치는 데 따르는 어려움과 외로움에 대해 서로 공감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7년 9월 14일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는 두 번이나 페롱 신부님을 찾아가서 여러 날 묵었다”고 밝혔다. 이어 “저는 신부님이 미리 알려주신 덕분으로 페롱 신부님을 잘 알고 있었고, 페롱 신부님도 저의 외로운 처지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서로 우정을 느꼈다”며 “또 우리가 인연으로 함께 묶여있음을 미리 맛보고 있는 터였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함께 나눴다”고 손골에서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손골은 30년 가까이 신자들과 선교사들의 터전이 된 곳이었지만 1866년 병인박해로 스러지고 만다. 병인박해 당시 손골을 사목하던 도리 신부는 교우촌 신자들을 모두 떠나게 한 뒤 홀로 손골에 남아있다 체포돼 순고했다.


☞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 한덕골 사적지 - 형제들과 해후하고 성사 집전한 장소


한덕골 사적지는 인근에 자리한 미리내성지, 은이성지 등과 마찬가지로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만든 교우촌이었다.


한덕골은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은이공소에 정착하기 전에 머물렀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솔뫼에 살던 김대건 신부의 가족은 정해박해 당시 박해를 피해 서울 청파동으로 갔다가 한덕골에 머물렀다고 한다. 김대건 신부 일가의 족보에 따르면 김대건 신부의 조부 김택현과 숙부 김제철의 묘가 한덕동에 있다고 기록돼있다.


또한 한덕골 교우촌은 최양업 신부가 머무르며 형제들과 해후한 곳이기도 하다. 최양업 신부의 둘째 큰아버지인 최영겸(베드로)은 가족들과 함께 1837년부터 정착해 살았다. 기해박해로 최양업 신부의 부모인 최경환과 이성례가 순교하자 최양업 신부의 막냇동생 최신정은 큰아버지가 살고 있는 이 한덕골로 와서 생활했다. 1849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귀국한 최양업 신부는 한덕골을 찾아 동생과 상봉하고, 이후에도 이곳에 들러 성사를 집전하곤 했다고 전해진다.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묵리 619-1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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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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