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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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에서 만난 한국교회사(29·끝)] 수원화성순교성지 : 6·25 한국전쟁과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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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응영 뽈리데시데라도’, ‘유영근 요한’, ‘요한 콜랭’.
수원화성순교성지 제대 오른편에는 성지가 현양하는 하느님의 종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대부분 1866년 시작된 병인박해 순교자들이지만, 그중 마지막 3명은 순교한 연도가 1950년으로 적혀있었다. 6·25전쟁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이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지 불과 5년 만에 교회는 또다시 큰 수난을 겪어야 했다.


 

■ 남북으로 갈린 교회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태평양전쟁 끝에 연합국에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았다. 일제에서 벗어났지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머물면서 교회도 남북으로 갈라지고 말았다.

 

 

특히 교회는 대한민국이 정부를 수립하는데 기여했다. 미국교회에서 시작한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남한을 통치하던 미국정과 긍정적인 관계를 지속했고, 1949년 4월 교황청은 정식으로 ‘대한민국’을 인정하고 교황사절을 임명했다.

 

 

그러나 북한교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교회를 ‘남한과의 비밀 연락 근거지’로 여기면서 신부들을 체포하고 교회 시설물을 몰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박해가 심해졌지만, 신부들은 본당을 지켰다. 아직 남쪽으로 넘어가지 못한 신자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춘천교구 양양본당 제3대 주임신부였던 하느님의 종 이광재(디모테오) 신부는 신자들이 몰래 남한으로 피신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신부는 “나보다 훌륭한 성직자, 수도자들이 하나라도 더 월남해 남한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힘껏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목표라며 38선을 넘어 월남하려는 성직자, 수도자, 신자들을 무사히 남한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월남을 돕는 동시에 북한에 남아 있는 신자들을 위해 북한 지역을 돌아다니며 성사를 집전했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1950년 6월 24일 밤부터 25일 새벽 사이에 제국주의자들의 첩자라는 죄목으로 북한에 남아 있던 13명의 한국인 신부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했다.


 

 

■ 또 다른 박해

 

 

전쟁이 일어나자 교회는 북한군의 표적이 됐다. 공산주의자들에게 교회는 일하지 않고 벌어들이는 착취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군에게는 교회의 지도자라는 것만으로도 박해의 이유가 됐다. 게다가 전쟁이라는 인간성을 상실한 특수한 상황 때문에 박해는 조선시대에 일어난 박해보다도 더욱 빠르고 가혹하게 진행됐다.

 

 

전쟁이 시작되고 북한군은 순식간에 남한 일대를 점령했고, 2~3달 안에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 150여 명이 납치되거나 처형됐다. 성직자라는 이유만으로 즉각 총살을 당하기도 했고, 어느 날 갑자기 납치돼 행방불명되는 일도 잦았다. 특히 연합군의 반격으로 북한군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런 상황은 더욱 심해졌다. 그중에는 하느님의 종 홍용호(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를 비롯한 5명의 주교와 각 교구의 지도자들이 포함됐다. 북한군의 박해로 한국교회는 지도층을 대거 잃고 말았다.

 

 

짧은 시간에 많은 성직자들이 잡혀 들어간 것이 가장 큰 피해였지만, 물적 피해도 많았다. 북한군 점령 기간이 길었을 뿐 아니라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던 서울, 경기, 강원도 지역은 특히 물적 피해가 컸다. 북한군은 성당을 빼앗아 사용하면서 내부를 훼손하고 성물 등을 약탈했다. 또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 폭격 등으로 성당이 파괴되는 일도 잦았다.

 

 

1950년 11월 전세가 역전되자 북한군은 포로로 붙잡혔던 외국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평양과 중강진을 거쳐 하창리 포로수용소로 이동시켰다. 또한 6·25전쟁 이전 잡아들였던 북한 지역 성직자 수도자들은 10월부터 북쪽으로 보내 만포를 거쳐 옥사독 수용소에 억류시켰다. 이 과정에서 북한군은 포로들을 열악한 위생환경 속에서 음식도 제대로 주지 않고 영하 40℃에 엄동설한에 강제로 걸어서 이동하도록 했다. 때문에 이 혹독한 과정 속에서 많은 포로들이 병사·동사·아사했고, 또 북한군에게 살해됐다. 그래서 이 두 이동을 ‘죽음의 행진’이라고 불린다. 이 죽음의 행진 속에서 여러 성직자·수도자들이 기도와 형제애로 서로를 다독이며 신앙의 삶을 증거했다.

 

 

죽음의 행진에서 살아남아 전쟁 후 고국으로 송환된 마리 으제니 수녀(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1997년 선종)는 회고를 통해 “간수들은 우리에게 사상교육을 해보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면서 “그들은 우리의 처신, 참을성, 서로에 대한 애덕 실천, 영웅적인 죽음 등 모든 것에서 더 많은 감명을 받았을 것”이라고 전했다.


 

 

■ 교계제도의 설정

 

 

한국교회는 전쟁으로 인적, 물적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특히 휴전 이후 북한교회는 ‘침묵의 교회’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다시 활발하게 하느님 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특히 한국교회는 전국 곳곳의 파괴된 성당과 시설을 복구하는 동시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 한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가톨릭복지위원회는 원조사업을 전개, 미국교회에서 받은 구호물품을 각지의 본당과 교회시설을 통해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나눠줬다.

 

 

이런 교회의 활동에 호감을 느끼는 이들이 많아졌고, 이를 계기로 입교자들도 늘어났다.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의지할 곳을 찾던 사람들과 실향민들이 교회를 찾았다. 휴전이 이뤄진 1953년 한국교회 신자 수는 16만6471명이었지만, 1960년에는 45만1808명이 됐고, 1962년에는 53만217명이 됐다. 불과 10년 사이에 신자 수가 3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 조선천주교 순교자현양회 등 다양한 신심단체들이 확산됐다.

 

 

이런 교세의 성장에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교황령을 통해 서울·대구·광주대목구를 대교구로, 나머지 대목구들도 교구로 승격시켰다. 교황청이 직접 관할하는 교황대리감목구에서 이제 정식 교계제도가 설정된 것이다. 마침내 한국교회가 보편교회의 일원으로서 독자적으로 일어설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승훈 기자 joseph@catime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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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4-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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