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은 자비로운 구원자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의 축제이자 장차 하느님의 영원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으로 기뻐하는 때다. 그러나 끊임없는 폭력과 전쟁, 인간 존엄성 파괴와 생태 위기의 가속화 등 세상은 절망에 신음하고 있다. 절망적 시대를 순례하는 ‘희망의 순례자’인 우리들에게 희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10월 19일 수원가톨릭대 하상관에서 열린 수원가톨릭대학교 이성과신앙연구소(소장 전홍 요한세례자 신부)의 제47회 학술발표회 ‘희망의 순례자를 위한 희년의 신학’에서 희년의 의미를 찾아본다.
회개와 희망 함께 담고 있는 희년, 먼저 교회의 내적 회개 필요
■ 희년 거행에 담긴 ‘희망’
1300년 식량난과 전염병,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도움을 얻기 위한 죄의 용서를 요청하자 교회가 이에 응답하면서 첫 희년이 시작됐다. 첫 희년이 하느님의 은총을 요청하고, 이 요청에 합당한 회개를 드러내고자 했던 것처럼, 희년에는 먼저 하느님의 현존에 어울리는 교회의 내적 회개를 필요로 한다.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기정만(에제키엘) 신부는 이날 ‘희년 거행에 담긴 희망에 관한 신학적 고찰: 시간 차원에서의 창조·구원·종말론을 중심으로’에서 먼저 교회의 희년이 회개와 희망을 함께 담고 있음을 고찰했다.
기 신부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2000년 대희년 반포 칙서를 살폈다. 2000년 대희년은 사전 단계에서 새로운 복음화를 위해 요청되는 회개를 요청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희년 준비단계에서는 희년 안에서 용서와 해방의 은총으로 현재를 성화시키실 하느님께 희망의 중심을 두었다.
그는 “2025년 희년을 선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칙서도 2000년 대희년 준비와 비슷하게,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신·망·애를 토대로 희년이 지니는 ‘오시는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부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00년대 들어 두 번 맞이한 정기 희년이 담고 있는 중심 주제 역시 하느님으로부터 발하는 희망”이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이 희년의 희망은 그리스도교 생활의 핵심인 믿음, 소망, 사랑, 즉 대신덕이라는 점이 강조된다. 성부의 사랑에 근거한 성자의 오심과 믿음에서 오는 희망이다.
기 신부는 두 교황의 칙서를 통해 희년의 핵심을 “하느님의 오심에 의한 은총의 때”라고 짚었다. 그는 “교회의 희년은 전례력으로 표현하자면 대림 시기”라며 “그리스도의 강생과 파스카 그리고 성령 파견을 통한 종말의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충만한 때”라고 설명했다. 이어 구약의 안식일, 안식년, 속죄일을 분석하면서 희년이 기존의 시간을 폐기해 버리는 반복적 회귀를 말하는 고대 종교들과는 달리, 하느님의 약속과 희망을 오늘, 바로 현재에서 실현하는 시간의 충만을 상징함을 역설했다.
특히 희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 성취를 이룬다. 기 신부는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의 시간 안에 이미 종말의 시간이 시작됐고 그리스도인들은 역사의 시간을 살아가면서도 이미 도래한 종말의 시간에 힘입어 그것의 완성을 향해 희망의 순례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교회의 삶과 사명은 교회가 창출하고 꾸미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고 구원하러 오시는 하느님께 주도권이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한 기 신부는 “따라서 우리 삶의 모든 시간을 당신 안으로 품으시는 하느님께로 전부 개방하는 것이 있는 그대로의 그분을 만나는 희망찬 순례의 시작이요 본질이 될 것”라고 전했다.
뿔 나팔 소리는 하느님 현존 상징…구체적인 희년 정신 실현 노력 필요
■ 희년의 실현
이처럼 희년이 우리의 세속적 주도권을 내려놓고 하느님과의 영적인 친밀함 속에서 우리의 시간과 역사를 성화시키는 것에 희망을 두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희년의 정신을 실현해 나갈 수 있을까?
광주가톨릭대학교 김명숙(소피아) 교수는 ‘희년과 희년을 신호한 숫양 뿔 나팔의 상징성 고찰’을 발표하면서 그 대답을 찾아나갔다.
희년을 뜻하는 히브리어 ‘요벨’의 어원은 숫양으로 추정된다. 김 교수는 발제를 통해 이 숫양의 뿔 나팔 소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뿔 나팔은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환기하는 역할을 했다.
김 교수는 “레위기 25장에서 숫양 뿔 나팔, 곧 요벨로 희년을 신호하게 함으로써 희년 선포의 주체가 누구인지 환기할 수 있었을 것”이라면서 “희년과 속량 제도는 천지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온 땅의 주인이시며, 이스라엘은 그분의 종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희년의 정신을 실현하기 위한 제언을 덧붙였다.
김 교수는 “희년의 기초라 할 수 있는 안식년은 들짐승과 땅의 휴식까지 보장하려는 제도”라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우리의 집이 돼주는 자연 생태계에 감사하는 말, 우리의 양식으로 식탁에 올라오게 된 모든 동식물의 희생을 기억하는 기도를 바치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식사 전 기도’를 바치면서 생태계에 감사하는 말을 덧붙이면 정기적으로 기도 중에 희년의 정신을 되새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희년법에서 전달되는 메시지는 약자 보호와 연관된다”면서 “자본 중심의 신자유주의 경제 구조에 덫에 걸린 이들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교수는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개인의 차원에서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형편에 따라 이자를 안 받거나 적게 받고, 집주인은 입주자의 사정을 고려해 집세를 너무 올리지 않는 등의 노력” 등을 제시했다.
이날 학술발표회에 참석한 교구장 이용훈(마티아) 주교도 축사 중 프란치스코 교황의 칙서를 인용하며 희년의 정신을 실천하는 방법에 관해 전했다.
이 주교는 “교황은 전통적 희년 여정인 성지순례, 화해, 기도와 전례, 신앙고백, 대사뿐만 아니라 구체적 행동을 통해 실천하기를 요청한다”며 “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관심,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연대와 지원, 청소년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격려하고, 청년들에게 힘을 쏟는 것, 공동의 집을 잘 돌보는 것” 등을 제안했다.
김 교수는 “우리는 희년의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시노달리타스도 실제로 펼쳐갈 수 있을 것”이라며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의지가 하나로 만날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