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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의 우화소설 「연어」에서 주인공 은빛연어가 맑은눈연어를 만나 `마음의 눈`을 뜨게 되는 대화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까 네가 내 앞으로 지나갈 때 말이야. 그때 내 눈에 번쩍 하는 빛이 보였거든."
"빛이?"
"틀림없이 봤어, 내 눈을 멀게 할 것처럼 강렬한 빛을."
"그건 마음의 눈으로 나를 보았기 때문일 거야. 마음의 눈으로 보면 온 세상이 아름답거든."
# 수난과 고난 이겨낸 바오로 대단해
시각장애 청소년들이 지닌 `마음의 눈`은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밝다.
사도 바오로가 27개월 가까이 머물며 복음을 설파한 터키 서남부 지중해 연안 에페소.

▲ 이명신(로사, 가운데) 수녀가 청소년들 손을 잡고 유적 형태를 그려가며 에페소를 설명하고 있다.
멀리 뒤로 보이는 건물이 135년 건축된 셀수스 도서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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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도시 역사만큼이나 찬란한 지중해문명 중심지였으나 지금은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 됐다. 돌기둥과 대리석 도로, 그나마 형체가 남아있는 셀수스 도서관 건물이 눈에 보이는 전부이다시피하다.
더구나 섭씨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과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행 인파가 순례 6일째인 우리를 녹초로 만든다. 바람이 지나가는 그늘에 주저앉아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런데도 청소년들은 이것저것 부지런히 만져보며 잘도 본다. 도미티안 황제 신전, 폴로 우물, 트라얀 황제 신전, 유곽촌 등에 남아 있는 기둥 문양을 더듬으면서 "아름답다"는 감탄사를 연발한다. 2만5000여 명을 수용하는 로마식 원형극장에 들어서자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설교를 하셨을 거야", "아니야, 은장이들한테 봉변(사도 19)을 당하신 곳이야"라며 옥신각신한다. 사도행전과 바오로서간을 몇 번씩 읽고 왔다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것 같다.
유재준(요셉, 17)군은 "이 뙤약볕 아래에서 온갖 수난과 고난을 이겨내며 복음을 전한 바오로가 정말 대단하다"며 감탄한다. 그러더니 대뜸 "세례명을 바오로로 바꾸고 싶은 `필(feel)`이 오는데 어떻게 하면 되냐?"라는 질문으로 웃음폭탄을 터뜨린다.
로마제국의 지중해 교역항이었던 에페소는 사도 바오로의 선교본부나 다름없다. 바오로는 이곳에 장기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고, 코린토 신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적대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큰 문이 나에게 열려 있다"(1코린 16,9)며 자신감을 드러낸 곳이다.
원형극장에서 당한 봉변이란 아르테미스 신당 모형을 팔아 큰 돈을 번 은세공업자들이 바오로 때문에 수입이 줄자 일행을 극장으로 끌고가 소란을 일으킨 사건을 말한다. 당시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에 대한 에페소 시민들 숭배는 대단했다. 바오로가 그런 그들에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다"라고 외쳤으니 그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바오로가 3번째 전도여행이 끝나갈 무렵에 도착한 밀레토스 순례는 더욱 짜릿한 감흥을 준다.

▲ 순례 마지막 날 이스탄불 시내 성령성당에서 감사미사를 봉헌한 시각장애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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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작별인사 항구도시 밀레토스는 퇴적물이 쌓여 잡초와 갈대가 무성한 내륙으로 변해 있다. 투옥과 환난을 각오하고 예루살렘행을 결심한 바오로는 이곳에서 에페소 원로들과 눈물의 작별인사를 한다.
로마 속주 고대도시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원형극장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성경을 편다. 그의 고별사가 생생히 마음에까지 울린다.
"…나는 유다인들의 음모로 여러 시련을 겪고 눈물을 흘리며 아주 겸손히 주님을 섬겼습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려 주 예수님께 받은 직무 곧 하느님 은총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다 마칠 수만 있다면, 내 목숨이야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두루 돌아다니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사도 20,17-38).
바오로는 저 아래 건너다 보이는 갈대밭 어디쯤에서 배에 올랐을 것이다. 에페소 원로들은 "다시는 내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가슴이 아파 그의 목을 껴안고 흐느껴 울었다.
하느님 빛에 눈이 멀어 기고만장한 교회 박해자에서 이방인의 사도로 변신한 바오로. 체구는 작고, 말주변은 없고, 병약하기 짝이 없는 그는 모진 수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열렬히 증언하다 그렇게 마지막을 예비한다.
"장애 때문에 세상을 원망하고, 때로는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다"는 김종석(안드레아, 19)군은 "사도의 지치지 않는 열망과 고난 속에서도 꼭 붙들고 있었던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