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이었을까. 그것은 어떤 주술 소리와도 같았다. 똑같은 음률로 반복되는 일정한 리듬의 웅얼거림이 병약한 내 영혼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를 이끄는 이 소리는 무엇일까. 어디서 나는 소릴까.
신비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그 소리는 한여름 뙤약볕의 담 너머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피폐해진 몸을 일으켜 자석에 끌리듯 소리를 따라 낯선 집 2층 계단으로 힘없이 올라갔다. 거기에는 부녀자들 여럿이 둘러앉아 성모상 앞에서 묵주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비신자였으니 레지오 마리애 회합을 모를 때였고, 그들 또한 초췌하게 찾아든 젊은 여인을 알 리가 없었다.
그것이 기도 소리인 줄은 더욱 알 리 없었지만 다만 이 소리가 나를 불렀노라 말했다. "성모님이 보내셨구나." 그렇게 말한 그들은 회합 후 우리 집으로 와서 이 병자를 위해 공동 묵주기도를 드려줬다. 감격한 나는 그때 성모상을 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그로부터 35년의 세월이 훌쩍 흘렀다.
성모님은 그렇게 묵주기도를 통해 내게로 오셨다. 신앙 입문의 초기, 생사를 넘나드는 수많은 육신의 고통은 누가 준 것일까. 그것을 이겨낼 힘 또한 어디서 온 것일까. 그러나 나는 안다. 수없이 병원 입ㆍ퇴원을 거듭하는 극한의 시련 속에서도 무지한 심령을 지켜준 것은 오로지 성령의 힘이었다는 것을. 또한, 빛처럼 길을 인도해준 성모님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젊은 새댁이 새집으로 이사 오자마자 병이 났으므로 이사를 잘못 온 거라며 친정에선 굿을 서둘렀다. 남편이 일 년 앞서 영세했으니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일 마음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영세 전이었으나 마음의 심지에서 미신을 강하게 거부하는 마음은 신념처럼 굳어져 있었고 누군가가 쥐어준 묵주를 손에 쥔 채 잠들곤 했다. 그리고는 일 년 후, 세례성사를 통해 모든 병증은 서서히 물러났다.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눈으로 보여준 신앙 여정이었다.
얼마 전 성모순례지 감곡을 방문했을 때, 흰 꽃잎이 눈송이처럼 흘러내리던 동산에서 사람들은 묵주기도의 띠를 이루고 있었다. 점선처럼 이어가고 있는 침묵의 기도 행렬, 그것은 마치 천상으로 향하는 계단의 시작과도 같았다. 오월 풍경은 정지된 듯 고요했고 평화의 정점이 그들 가운데 머무르고 있었다. 기도의 은총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우리나라 초창기 교회 시절, 묵주는 귀한 성물이었다. 여신도들은 묵주를 지니기는커녕 묵주 알을 한 알씩 구해 저고리 앞섶에다 달고 다니며 기도했다고 한다. 옷자락에 달린 묵주 알을 만지작거리던 그 간절하고 순수했던 신심을, 풍요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과연 흉내 낼 수 있을까.
맨발의 가르멜회 로랑 수사는 평수사로 살면서 신발 수선과 요리사, 포도주 배달 등 허드렛일로 평생을 보내면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내며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는 죄인들 사이에서 상석을 차지하기보다는, 하느님의 집에서 말석에 앉아 생을 마감하기를 택한 것이다. 묵주는 이렇듯 겸손이요 순명이며 말 없는 보속이다.
그러나 이즈음의 나는 수십 년 해오는 레지오 마리애 활동마저 타성에 젖을 때가 많다. 의무 때문에 주회를 하고, 습관처럼 지각을 하니 열정에 불타던 초기 성모신심은 다 어디로 달아났을까. 초심자 시절에 들리던 그 아름다웠던 묵주기도 소리는 이제 내게 들려오지 않을 것인가.
기도하지 않은 영혼은 메마른 산이다. 초록이 무성한 숲은 기도하는 영혼의 모습이다. 매일 새벽 산길을 오르며 오늘도 나는 습관처럼 향나무 묵주를 손에 꼭 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