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50여 년 전, 비무장지대는 지금과는 당연히 비교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철책도 없고 군사분계선이라는 표지판만 군데군데 비바람에 쓰러진 채 놓여 있는데, 그나마도 잡목이나 가시덩굴 속에 파묻혀서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1961년 강원도 산속의 겨울, 21살의 젊은 나이에 GP(감시초소) 근무에 투입되느라 밤중에 한 줄로 서서 앞사람 발자국 따라 무릎까지 빠지는 눈을 헤치면서 숨죽이고 GP에 들어가 놀란 토끼마냥 웅크리고 있다가 날이 밝았는데, 코앞에 있는 북한군 GP에서 "동무들 잘 왔다. 교대하느라고 수고했다"면서 아유를 하고 있으니 앞이 캄캄하고 "어,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그야말로 공포심밖에는 그 어느 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게다가 GP장은 고열과 설사로 후송되고 GP분위기는 불안과 적막, 공포…. 말 그대로 벌벌 떨고 있을 뿐 대안도 대책도 없는 상태였지요.
저도 모르게 성호를 긋고 주님의 기도, 성모송… 계속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고 어머님께서 주신 묵주는 목에 걸려 있기는 하지만 손에 잡을 여유도 없이 해가 뜨면 "하느님, 감사합니다." 또 어두움이 다가오면 성호를 그으면서 "하느님 살려주십시오. 여기서 살려만 주신다면, 매일 성당에 가서 살겠습니다. 맹세, 또 맹세…." 생사에 관한 기도라 간절함을 넘어 애절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금 그 맹세는 어느 곳에서 쉬고 있는지… 이렇게 한평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고해소를 찾아야 할 사람이 오만해서인지 아니면 어머님의 묵주기도를 도와 드리려는 건지, 90을 바라보는 노모에게 빛의 신비, 영광의 신비 하면서 요일마다 기도가 다르다고 선생 노릇하려다가 "내가 그런 것 아냐? 나는 그냥 성모님께 매달리면서 천주경(주님의 기도) 한 번, 성모경(성모송) 열 번밖에 모른다" 하시면서 나무 묵주를 어찌나 만지셨는지.
돌아가실 때 어머님 가슴 위에 포개진 두 손에 들려드린 묵주가 닳아진 모습이 곱고 아름답게 지금도 투영됩니다. 아버님 먼저 보내드리고 하루종일 묵주기도만 하신 것이 GP에서 묵주만 잡고 살려 달라던 모습과 비슷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묵주기도는 성모님의 도움으로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로서 형식이나 방법보다는 어머님처럼 매달려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 나이에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님처럼 매일 기도를 드리는 지금은 어머님 생각에 잠기면서도 부질없이 아내나 자식들, 손자까지 묵주기도를 잘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되곤 합니다.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주님 말씀을 뒤로 한 채 `내 탓이오`를 하면서도 또 잘난 척하려 들고 있는 자신을 바라봅니다. 요즘은 각 단마다 지향을 두고 묵주기도를 바칩니다. 예를 들면 5단 마지막 세단은 손주 녀석 셋을 위해 나란히 바치고, 4단 첫 번째는 본당 신자를, 2단 네 번째 다섯 번째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서….
이처럼 묵주 알마다 고정된 지향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니까 묵주 없이도 묵주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신기한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혹시 다른 사람이 먼저 이런 방법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 또 한 번 바보가 된다는 생각도 해봅니다만, 아무튼 저는 이런 방법으로 이제는 습관적으로 매일매일 성모님의 전구에 힘입어 묵주기도를 드리면서 노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즐겁고 재미있게 말입니다. 그러나 항상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성모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 저희 죄인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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