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의 교회가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와 문화 발전에 기여한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그리고 복음의 정신으로 가난과 불평등 물신주의와 싸워나가십시오.”
프란치스코 교황이 5일부터 8일 동안 남미 3개국을 누비며 전달한 메시지는 명료했다. 복음화 500년 역사에 대한 긍지를 갖고 현대사회의 도전들에 용감하게 맞서라는 것이다.
‘낮은 자리’를 즐겨 찾는 교황은 이번에도 세계 최대 가톨릭 인구를 자랑하는 브라질과 자신의 고국 아르헨티나를 제쳐두고 남미에서 소국(小國)에 속하는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로 먼저 달려갔다.
O… 교황은 이번 순방 중에 라틴아메리카의 뿌리와 가톨릭 신앙의 관계를 유독 강조했다. 교황은 5일 첫 방문국인 에콰도르에 도착하자마자 “하느님 자비와 그리스도 신앙이 수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면서 오늘의 라틴아메리카 문화를 만들어 낸 점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10일 볼리비아 알현 시간에는 “심지어 원주민 신부 중에도 토착어를 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런 과시적 엘리트주의에 빠지지 말고 여러분의 근본과 어투를 잘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메시지는 복음화 500년 역사와 전통에 안주한 채 영적 활기를 잃어가고 오랜 세월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해온 신앙적 가치가 서구 자본주의의 급격한 유입으로 약화되어가는 현실을 염두에 둔 것으로 풀이된다.
교황은 또 “과거 식민지 시대에 교회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원주민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해 깊이 사과하며 용서를 청한다”고 말했다.
사회주의당 소속으로 가톨릭 교회의 ‘정의를 향한 투쟁’에 비판적 입장인 볼리비아 모랄레스 대통령은 8일 공항 환영식에서 “교회는 역사 속에서 지배자와 정복자의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며 “그러나 이제 볼리비아 국민들은 희망과 기쁨 속에서 가톨릭 수장을 맞이하고 있다”고 인사했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볼리비아의 뿌리에는 가톨릭 신앙이 있다”며 “주교들이 사회 발전을 위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는 예언자적 발언은 복음적 목소리라는 걸 알아야 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또 “복음화는 이웃집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노크하고 들어가 사람들을 주님 곁으로 데려다 주는 것”이라며 겸손한 선교 활동을 당부했다.
O…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역대 어느 교황보다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잘 알고 있는 교황은 가는 곳마다 가난한 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불평등에 경종을 울렸다.
교황은 볼리비아 시민사회단체 운동가들과의 만남에서 “자본은 인간에게 봉사해야 하는데 21세기 자본주의는 인간을 배제하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한다”며 ‘고장 난 자본주의’ 시스템을 질타했다.
교황은 “그렇다고 내가 세상의 불평등과 가난에 대한 ‘처방전’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인간과 자연을 돈의 제단에 바쳐서는 안 되며 이런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원리가 복음에 담겨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황은 무분별한 개발과 다국적 기업들의 환경파괴로 몸살을 앓는 현실에 대해서도 눈을 돌렸다. 교황은 “돈에 대한 끝없는 탐욕이 빚어낸 고통과 죽음 파괴의 뒷전에서 4세기 카이사리아의 성 바실리오가 말한 ‘악마의 배설물’ 같은 악취가 난다”고 강한 어조로 비판했다. 이어 “현대사회의 시급한 과제 중 하나가 어머니 지구를 보호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서방 언론들은 이에 대해 “자본주의의 최대 약점을 공개토론에 부쳐 대안적 사회 경제 시스템 마련을 촉구하는 행보”라는 논평을 쏟아냈다. 미국 CNS는 “교황이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맹목적 경제 체제에 저항하는 불길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고 평가했다.
O… 교황은 8일 해발 3600m의 볼리비아 행정수도 라파즈로 이동할 때 고산병 예방을 위해 코카잎 허브차와 아니스 씨앗 등을 섭취하며 강행군했다. 또 저학력자가 많은 원주민들에게는 ‘공동선’을 “나한테만 좋은 것에서 벗어나 모두에게 좋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쉽게 풀어 설명하는 등 ‘눈높이 강론’에 신경을 썼다.
교황은 볼리비아 공항에서 대통령 궁으로 이동할 때 1980년 예수회 루이스 에스피날 신부가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희생된 장소에서 잠시 멈춰 기도하기도. 교황은 에스피날 신부를 ‘나의 형제’라고 부른 뒤 “그의 사목은 복음과 자유에 대한 강론 그 자체였다”고 말했다.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날 “에스피날 신부님이 평소 머리맡에 두고 기도했던 십자가를 복제한 것”이라며 공산주의의 표징인 ‘낫과 망치’로 장식된 십자가를 선물해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에스피날 신부와 한방을 썼던 하비에르 엘보(80) 신부가 “에스피날 신부는 그리스도인과 맑스시트 노동자들(망치)과 농부들(낫) 간의 대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증언해 오해가 풀렸다.
김원철 기자 wckim@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