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 쿠바 방문 아바나 혁명광장 미사서 “이념이 아닌 사람 섬겨라” 강조
▲ 프란치스코 교황이 20일 쿠바 혁명의 주역이자 전 국가평의회 의장인 피텔 카스트로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행복의 열쇠는 ‘사랑과 봉사’에 있는 것이지 누군가의 이데올로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쿠바 국민들에게 전했다. 또 미국과 쿠바의 역사적 수교 과정에서 막후 중재자 역할을 했던 교황은 “두 나라 수교는 전 세계 화해의 모범이 될 것이기에 지도자들은 관계 개선을 위해 인내를 갖고 노력해야 달라”고 당부했다.
19일부터 사흘 일정으로 카리브해의 섬나라 쿠바를 사목 방문한 교황은 20일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거행된 미사에서 “이념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봉사하라”고 강조했다. 21일 쿠바 제3의 도시 올긴에서 집전한 미사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의 편협한 시각을 교정해주고 겉모습이나 정치적 진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에 만족하지 않도록 이끌어 준다”고 말했다.
이는 1959년 공산 혁명 이후 최근까지 미국과 대치하면서 고립과 가난을 면치 못했던 국민들을 위로하고 향후 쿠바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쿠바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혁명 이후 사회주의 국가의 길을 걷는 동안 국민들은 가난과 감시 탄압에 시달렸다. 가톨릭 교회 역시 성직자 추방 신자 차별 교회 재산 몰수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일 바티칸에서 출발한 교황은 쿠바 방문을 마치고 22일 미국에 도착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환담 미 의회와 UN 총회 연설(25일) 필라델피아 세계 가정대회 참가(26일) 등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이번 쿠바ㆍ미국ㆍUN 방문은 즉위 후 10번째 해외 순방이자 최장(9박 10일) 여행이다. 강론을 포함해 공식 연설이 26회나 잡혀 있다.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바티칸 출국 직전 “매우 복합적인 목적을 가진 여행”이라며 “특히 교황의 미 의회 연설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밝혔다.
O…교황은 21일 올긴 혁명광장에서 집전한 미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자비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며 그분의 자비로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역설했다.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인 이날 교황은 마태오가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에 이끌려 제자로 따라나선 것을 언급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올긴 시민들은 노동절 퍼레이드와 혁명 기념행사 전용 장소였던 혁명광장에서 교황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감격스러워했다. 마리아 델 젤렉씨는 “가톨릭 신자들은 그동안 공산당 입당과 특정 직업에서 배제되는 등 심한 차별을 받았다”고 밝혔다. 안드레스 곤잘레스 신부는 “쿠바 가톨릭 교회가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려면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이라며 “하지만 교황 방문은 교회와 정부 간의 관계를 풀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O…교황은 이에 앞서 20일 수만 명이 운집한 아바나의 혁명광장 미사에서 “한 인간과 국가의 위대함은 약자를 위해 어떻게 봉사하는가에 달려 있다”며 이웃들 특히 사회적 약자에 대한 봉사를 강조했다. 교황은 또 미국과의 수교로 예상되는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염두에 둔 듯 “그리스도인은 형제자매들의 존엄성을 증진하고 때로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쿠바 혁명의 영웅 체 게바라의 조형물이 있는 혁명광장에는 이날 새벽부터 시민들이 몰려들어 떠들썩한 축제장을 방불케 했다. 바티칸에 따르면 쿠바는 전통적 가톨릭 국가이지만 공산 혁명 이후 종교 탄압과 감시로 인해 세례 신자는 국민의 60에 그친다.
아바나 대교구장 자이메 알라미노 추기경은 “선의와 필요한 질문으로 잠들어 있는 양심을 흔들어 깨워주고 쿠바와 미국이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힘써 준 데 대해 모든 국민의 이름으로 감사한다”고 말했다.
O…교황은 쿠바에서도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를 재차 역설했다. 20일 성직자 수도자들과 함께한 저녁기도 시간에 아바나 교구장이 “쿠바 교회는 자원은 빈곤하지만 일치와 형제애는 풍요롭다”고 하자 교황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듯 교회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편에 서려면 가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일치를 간혹 획일성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일치를 추구하라고 조언했다.
교황은 또 젊은이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금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희망”이라며 ‘희망’과 ‘연대’를 강조했다. 교황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갖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세태에 공감하면서도 “여러분의 의지와 지성을 무감각하게 만드는 유혹에 저항하라”고 조언했다.
O…교황은 20일 미사 후 쿠바 전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89)의 자택을 방문 30~40분간 비공식 만남을 가졌다. 교황청 대변인 롬바르디 신부는 “(비공식 만남이) 친밀하고 격식 없이 진행됐다”며 두 사람은 최근 발표된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비롯해 세계 경제 등 여러 주제로 대화를 이어갔다고 전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2012년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도전받는 윤리적 문제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들이 증가하는 것에 대해 전 교황 베네딕토 16세에게 질문 공세를 퍼부은 바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기억하고 영성 생활의 기쁨과 유머를 다룬 책을 그에게 선물했다.
피델 카스트로는 2008년 건강상 이유로 동생 라울 카스트로(84)에게 의장직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교황은 이날 현 국가평의회 의장 라울 카스트로를 만나 미국과 쿠바가 평화의 길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원철·김유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