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의 거목’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천주교회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고인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렇지만 김 전 대통령 역시 ‘민주화의 산파’ 역할을 한 한국 천주교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독재시절 신부들과 뜻 함께해
그 인연은 유신 독재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4년 말 재야민주화운동세력의 결집체였던 ‘민주회복국민회의’가 탄생 상임대표위원에 당시 서울대교구 윤형중 신부가 임명되자 김 전 대통령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물밑 지원을 받아 공동 대표위원을 맡았고 실무책임자 함세웅(서울대교구 원로사목자) 신부와 함께 이끌어 간다. ‘민주화’라는 공통분모를 공유한 김 전 대통령과 사제들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여부와 대통령 신임 여부를 묻는 2ㆍ12 국민투표 반대운동과 3ㆍ1 민주국민헌장 발표 등을 함께했지만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 발동과 함께 활동이 금지됐다.
유신의 종말을 이끌어낸 부마사태의 근저에도 김 전 대통령과 천주교회가 있다. 1979년 9월 당시 ‘선명 야당’의 기치를 내건 김 전 대통령이 총재로 선출되자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탄압이 시작됐고 이것이 부마사태 곧 ‘10ㆍ26사태’로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김재규가 거사(10ㆍ26사태)를 결심하게 된 계기는 부마민중항쟁이었고 서울 궁정동 만찬장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쏜 빌미도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탄압 이야기였다. 이에 앞서 그해 3월 발족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공동의장을 맡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은 1974년의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었고 이들 재야세력은 김 전 대통령과 그 뜻을 함께했다.
1983년 5월 당시 연금 상태에 있던 김 전 대통령의 단식투쟁은 민주화 여정에 실마리를 제공했다. 김수환 추기경 등 종교계의 단식 중단 호소에도 계속된 단식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1985년 총선 돌풍을 일으킨다. 이어 1987년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광주민중항쟁 7주기 미사’를 통해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조작 사실을 폭로하면서 김영삼ㆍ김대중 두 전 대통령 등 2200명이 함께하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됐고 이는 6ㆍ10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6ㆍ29선언과 함께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확실해지자 김영삼ㆍ김대중 두 전 대통령은 속내를 드러내며 후보 단일화에 실패했고 민주진영은 지역으로 갈리고 찢어진다.
명동성당에 공권력 투입
이후 3당 합당을 통해 집권에 성공한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6월 자신의 정치인생 역정에서 도움을 받았던 가톨릭교회의 상징 명동성당에 경찰력을 투입 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한국통신노조 간부들을 전원 연행하는 역설적 처신을 보이기도 했다.
김영삼 정부 집권 당시 청와대 교육문화사회수석을 지낸 김정남(요한)씨는 자신의 저서 「진실 광장에 서다」에서 “1993년 2월 25일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사를 통해 ‘오늘을 맞기까지 30년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며 자못 감격적으로 얘기했지만 문민정부의 출범은 민주화의 결과였을 뿐 민주화의 자랑스러운 결실도 완성도 아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