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신호 주교 삶과 신앙
 |
| ▲ 1971년 첫 영성체날 찍은 장 주교 사진. |
 |
| ▲ 1986년 2월 교리교사 시절 가천 피정의 집에서 교사들과 대화하는 장신호 주교. 왼쪽 두 번째. |
 |
| ▲ 1998년 8월 25일 사제 수품 후 가족 친지들과 기념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장신호 주교 제공 |
 |
| ▲ 1997년 12월, 부제 시절 로마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어부의 반지에 입맞추는 장신호 주교. |
 |
| ▲ 입대하기 전 대구 달성공원에서 찍은 빛바랜 가족 사진. 가운데가 장 주교. 장 주교는 이 사진을 군생활과 로마 유학생활 중에 붙여놓고 보곤 했다고 말했다. |
“아이고, 잘하셨네! 이제 주교님이 되셨으니 더 잘해야겠네.”
아들 신부의 보좌주교 임명 소식을 들은 장신호 주교의 아버지 장진희(베드로, 79, 대구 계산본당)씨는 곧바로 성당으로 달려가 기도했다. “성경 말씀대로 살면 탈이 없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아버지의 꿈은 사제. 장 주교는 매일 새벽 미사를 봉헌하고, 성령쇄신봉사회와 연령회에서 봉사를 해온 아버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장 주교의 어머니 김현순(안나, 77)씨는 “아버지가 못 이룬 꿈을 아들이 이뤘다”면서 꿈 이야기를 하나 해줘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머니에 따르면, 4남매 중 장남인 장 주교가 8살 때 동생들과 다투자 매를 들었는데 그날 밤 어머니는 장 주교가 그 매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꿨다. 어머니는 아들을 따라 하늘로 올라갔는데, 어느 멋진 집에서 사람들이 아들의 시중을 들고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꿈에서 깨어나 ‘하늘에서 이렇게 대접을 받는 아들인데, 내 아들이라고 너무 내 마음대로 했다’ 싶어 매를 꺾어 버렸다. 그리고 그 후로 한 번도 매를 들지 않았다.
교리 교사 하며 신앙 더 깊어져
어머니는 “3살 때 유치원에 갔다가 길을 잃어 밤 8시에 파출소에서 찾은 일을 빼고는 아들 때문에 신경 쓸 일은 한 번도 없었다”며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이 손해 보는 것을 못 보는 착한 아들”이라고 말했다.
장 주교는 고등학생 때까지 본당 복사단으로, 대학(영남대) 진학 후에도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했을 때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열린 사제 서품식에 참여했다.
“그때 많은 신자와 함께 교황님을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 또한 교리교사 생활을 하면서 학생들에게 교리를 더욱 열심히 가르치고, 신앙이 깊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학생들에게 ‘날으는 돈가스’라고 불린 그는 주일학교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신임이 두터웠다. 늦게까지 성당에 남을 때는 동료 교사들을 택시에 태워 귀가시켰고, 돈이 없을 땐 집까지 데려가 택시비를 쥐여줬다. 교사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는 다른 교사들을 탓하지 않고, 혼자 묵묵히 책임을 떠안았다.
주일학교 교사로 활동했던 시간은 그를 신학교로 이끌었고, 사제 생활을 꿈꾸게 한 터전이 됐다. 계산본당 주일학교에서 많은 성소자가 배출됐고, 장 주교도 선배들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
1993년 그는 2학년을 마치고 신학생 신분으로 로마 유학길에 올랐다. 1998년 사제품을 받고 1년간 봉덕본당 보좌로 사목했던 시간을 빼면 2002년까지 8년간 로마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유학 생활에서 오는 향수병은 대구 토박이인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그러나 2년마다 재유럽 대구대교구 사제 신학생 모임이 열렸고 여기에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들과 모여 모처럼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한국 음식을 먹었던 순간은 그에게 큰 힘이 됐다. 당시 교구장이었던 이문희 대주교가 한국에서 가져온 김치와 직접 끓여준 라면을 먹으며 향수병을 달래곤 했다.
온화한 성품에 대인관계 원만
장 주교에 대한 지인들의 평은 한결같다. 온화하고 성실하며, 특별히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깊다.
장 주교의 사제 생활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한 김명현(비산본당 주임) 신부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남들이 어려우면 차분하게 배려하고 도와주는 성품을 지녔다”면서 “일을 하나 부탁하면 두 번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완벽하게 해 무척 성실한 분”이라고 말했다. 장 주교와 로마에서 함께 생활한 김 신부는 장 주교가 2006년 대구가톨릭대 신문방송사 부주간을 맡았을 때 주간으로 함께 일했다.
신자들이 전례에 쉽게 다가가도록
2009년부터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로, 주교회의 전례서 편찬을 담당해온 장 주교는 가톨릭 전례학회 총서 시리즈 1권 「교회의 전례」 등을 번역했다. 전례서를 번역하면서 신앙생활에서 전례를 어렵게 느끼는 신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전례 관련 질문도 외면하지 않고 친절히 답글을 달아줬다. 그가 전례학을 전공하게 된 계기는 계산성당에서 주교가 주례하는 미사에서 복사를 서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이 전례로 옮겨가면서다.
장 주교가 생각하는 전례의 핵심은 사랑에 있다. 그는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웃에게도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데 그 힘은 전례에서 나온다”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다.
가톨릭 전례학회 회장 윤종식(가톨릭대 전례학 교수) 신부는 “장 주교님은 사람을 이해해 주려는 측면이 강하신 분이고,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지 않는 분”이라고 했다. 특히 “학문적인 탐구에 있어 끈질긴 면이 있어 존경한다”고 덧붙였다.
장 주교와 신학교 동기인 이성호(교구 성소 담당) 신부는 “평소에 늘 웃는 얼굴로 본인의 이야기를 하시기보다 경청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면서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불평, 불만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신부는 “교구가 커서 교구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다양한데, 경청과 화합의 탈렌트가 있으신 만큼 교구장님을 잘 보필해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장신호 주교 약력
1966년 5월 25일 대구 출생
1984년~1988년 영남대학교
1988년~1993년 대구가톨릭대학교
1993년~1996년 교황청립 사도들의 모후대학
1996년~1998년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교 전례학 석사
1998년 8월 25일 사제 수품
1998년~1999년 대구대교구 봉덕본당 보좌
1999년~2002년 교황청립 성 안셀모 대학교 전례학 박사
2002년~2009년 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2009년~현재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총무,
주교회의 전례서 편찬 담당
2016년 5월 31일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