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르실료를 다녀와서 (서울대교구 청년 28차) 이지혜 기자
누군가 내 삶이 어떠냐고 물으면 나는 답했다. “비 오는 날, 양손 가득 짐을 들고 낯선 도시에서 길을 헤매고 있다고. 행선지가 어디인 줄도 모르면서 부지런히 걷고만 있다”고.
14일부터 17일까지 휴대폰을 끄고 살았다. 남편도 없었고, 25개월 된 아들도 없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 꾸르실료 교육관에는 ‘청년 제28차 꾸르실료, 참 잘 오셨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먼저 꾸르실료를 수료한 선배들의 배웅으로, 청년 참가자들은 줄지어 교육관으로 들어갔다. 미소로 가득 찬 얼굴들이 손을 흔들며 “파이팅!” “잘하고 와!”를 외쳤다.
대표 봉사자가 말했다.
“잊어버리십시오. 주말 동안 가족과 친구들은 여러분 없이도 잘 지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다른 누군가가 해줄 것입니다. 여러분의 시간을 저희에게 맡겨주시면….”
나를 비롯한 꾸르실료 참가자 청년들은 먹으라면 먹고, 자라면 자고, 기도하라면 기도했다.
기도, 미사와 성체조배, 십자가의 길, 묵주기도, 고해성사, 침묵…. 신자로서 해왔던 모든 기도와 전례, 성사생활이 총집합해 있었다. 20년 넘게 신자로 살면서 겨우 주일 미사와 묵주기도만 간신히 했구나. 가끔 의무적으로 고해성사를 드렸을 뿐. 틈틈이 이어진 강의는 평신도로서 역할을 다시 생각하고, 균형이 맞지 않은 채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신앙을 바로 잡는 계기가 됐다.
성체조배는 실로 오랜만이었다. 회사에서는 직장인, 가정에서는 아내와 엄마로서만 살았던 내 생활에서 성체조배를 위한 시간을 꺼내쓰지 못했다. 아이와 함께 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자부해왔으니깐.
그런데 성체 앞에 무릎을 꿇는 순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사랑 없이 기계처럼 집안일을 하고, 미소를 잃은 채 늦은 밤까지 반찬을 만드는 내게 하느님이 다가 와 “잠시, 나랑 이야기 좀 하자”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진 질문. “왜 사느냐?”
꾸르실료에 참가한 50여 명 청년은 교회 곳곳에서 많은 봉사를 하는 아름다운 일꾼들이었다. 상처와 고민이 많아 가끔 힘을 잃곤 했지만…. 우리는 3박 4일 동안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렸다. 우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평신도 사도직’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며, 그 역할을 고민했다. 행복한 신앙인으로 뿌리내리기로 다짐도 했다.
생각해 보면, 하느님의 은총은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지고 있는데 그 은총을 가리는 장애가 많았다. 그 장애물은 ‘내가 내 힘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의지와 맞닿아 있다. 3박 4일의 여정 후 청년들은 확신에 찬 기쁜 미소를 머금고 가정과 사회로 돌아갔다. ‘평신도 사도’라는 이름으로.
이지혜 기자 bonaism@pbc.co.kr
꾸르실료 운동이란
꾸르실료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0년대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서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세 차례의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전역을 무질서와 혼란에 빠트렸다.
‘반(反) 성직자 분위기’로 시작된 내전 기간 성직자와 수도자 7만 2500여 명이 살해를 당했다. 반(反) 성직자 분위기는 비(非) 그리스도화된 세상으로 번졌고, 청년들 사이에선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1939년 내전이 끝난 후, 가톨릭 청년들은 “젊은이들이여, 산티아고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산티아고에 있는 사도 성 야고보의 무덤을 향한 국토 순례 대행진을 계획한다. 스페인 교회는 10만 명의 청년을 이끌고 갈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이냐시오 영신수련의 내용과 방법을 도입한 7일간의 피정을 준비하는 데 이것이 꾸르실료(Cursillo, 크리스천 생활의 꾸르실료 운동)다. 영어로는 ‘단기 과정’이라는 뜻이다. 7일 일정은 1943년부터 3박 4일로 줄어들었다.
순례 대행진 후 순례를 준비했던 지도자들은 꾸르실료를 교회 운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당시 마요르카교구장 에르바스 주교는 꾸르실료를 평신도 운동으로 교계제도 안으로 흡수한다. 이 결정으로 1949년 1월 산 오노라토 수도원에서 공식적인 세계 제1차 꾸르실료가 열렸다. 제1차 한국 꾸르실료는 1967년 5월 7일 서울대교구 성수동성당에서 시작했다. 이후 인천교구를 시작으로 15개 교구로 확산됐다. 내년이면 꾸르실료 한국 도입 50주년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