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사제들의 북방행로, 평화의 길 선교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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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관구 대신학생들이 조바자츠에서 김대건 성인 동상 건립 경위를 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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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일 서울관구 대신학교 신학생들이 김대건로를 걸으며 묵주기도를 바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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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년째 신축 중인 지린교구의 첫 본당 조바자츠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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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관구 대신학교 4학년생들이 조바자츠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한 뒤 감사의 뜻으로 우리 생활성가 ‘꽃’을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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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바자츠 교우촌 어린이들이 기도를 바치고 있다. |
청년 김대건과 최양업이 걸었던 북방행로를 따라 ‘평화로 가는 길’을 떠났다.
북한과 맞닿은 중국 지린성 성도 창춘시에서 지린시, 백두산을 거쳐 장백조선족자치현과 퉁화시, 지안시, 단둥시에 이르는 조ㆍ중 접경으로 가는 여정은 ‘끝이 보이지 않는’ 먼 길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옥수수와 텅 빈 들녘, 추레한 농가와 농민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해 저물어 산도, 길도, 마을도 어둠으로 지워져 갈 즈음에야 국경에 닿았다.
‘꽃보다 푸르게 눈 뜨던’ 두 조선 청년의 뜨겁던 선교 열정을 만주벌과 북녘 산하는 기억하고 있을까?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위원장 정세덕 신부)는 16일부터 5박 6일간 두 조선 사제의 복음화의 열정이 녹아있는 지린ㆍ랴오닝 교구, 조ㆍ중 접경에서 ‘평화로 가는 길’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퇴적된, 혹은 현존하는 역사의 흔적을 찾아 떠난 여정은 달콤하고도 쌉싸래했다. 김대건ㆍ최양업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았던 지린교구의 조바자츠(소팔가자, 小八家子) 성당에서의 미사 전례, 김대건 신부를 따라 ‘주님 홀로 가신 그 길을’ 걷는 지린(길림, 吉林) 신철학원 신학도들과 만남, 겨레의 거룩한 대지 백두와 북녘 산하가 아스라한 국경을 따라 횡단하는 분단 체험 등 동행 취재기를 세 차례로 나눠 싣는다.
막 수확을 끝낸 노오란 옥수수가 지천인 조바자츠로 가는 길에 후득후득 수수알 흩뿌리듯 가을비가 내렸다.
창춘시 눙안현 허룽진을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만주에서 보기 힘든 가로숫길을 만났다. 그 길을 따라 들어서자 ‘김대건로’라고 쓰인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1997년 7월 서울대교구 가락동본당 공동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김대건 성인 성역화 추진위원회가 허룽진에서 조바자츠까지 9.7㎞ 구간을 아스팔트로 포장하면서 세운 것으로, 뒷면엔 김대건로 조성 경위가 기록돼 있다.
신학생들은 점점 세지는 빗발에도 버스에서 내려 걸으며 묵주 기도를 바친다. 시골 길인데도 과속하는 차량을 피해 질척질척한 빗길을 걸어야 하지만, 기도 소리는 커지고 열기 또한 뜨겁다.
동네 어귀로 들어서자 알 굵은 옥수수가 비를 맞으며 마당마다 널려 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에야 새로 짓는 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공사에 들어간 지 2년째라고 하는데, 공사가 마무리되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듯하다. 1796년 교우촌이 처음 형성돼 올해로 설립 220주년을 맞는 조바자츠 교우촌에 지어진 성당으로는 여섯 번째다. 숱한 박해로, 특히 1899년 의화단 사건, 1966년 문화혁명 시기 등 네 차례에 걸쳐 파괴됐다. 훗날 다시 건립했지만, 성당이 낡아 못 쓰게 돼 이번에 다시 짓게 됐다. 그래서 옛 성당 정취는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신앙의 맥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교우촌에서 정성껏 준비해 놓은 늦은 점심으로 끼니를 때우고 순례에 들어갔다. 먼저 성당 뒤로 돌아가 김대건 기념관부터 찾았다. 양로원을 겸하고 있어 어르신들의 환영을 받으며 5층 전시실에 들어서니 김대건 신부의 유해 현시대와 함께 현지 교우들이 그린 초기 교회와 박해 모습, 사진, 유물 등이 전시돼 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이번에는 조바자츠 교우촌의 발자취를 담은 역사관이다. 2003년 중국 돈으로 20만 위안을 들여 지상 5층에 8264.46㎡ 규모로 준공된 이 기념관은 과거 김대건 신부가 머물렀던 본당 총회장 집의 작은 방 위에 세워져 더 의미가 크다. 그 뒤에는 김대건 신부가 성모성심수녀회 회원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던 수녀원 터가 남아 있고, 그 터에는 현재 바자츠소학(八家子小學)이 들어서 있다. 또 1844년에는 라틴학원이 세워져 어린 교우들의 교리 교육과 전통문화 교육, 라틴어 교육을 도맡았다고 한다.
기념관을 나와 성당으로 향하려니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신학생들을 맞아준다. 1842년 11월 조바자츠에 도착한 청년 김대건과 최양업은 이곳을 거점으로 조선 입국로를 모색했고, 김대건은 1844년 12월 25일께 부제품을 받기까지 2년 2개월을, 최양업은 1846년 12월 2차 입국로 탐색까지 4년 2개월을 조바자츠에서 활동했다. 그 조선 첫 사제와의 인연을 기려 세운 동상 앞에서 신학생들은 다시 한 번 숙연해진다.
신축 중인 성당을 지나 임시 성전으로 쓰는 마을회관에서 주임 팡씨펑(龐喜峰) 신부 주례로 현지 교우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 종소리 한 번에 교우촌의 모든 교우가 몰려들고, 제대 앞 풍금 반주에 맞춰 아이들로 이뤄진 성가대의 찬미 노래소리가 천상의 소리처럼 아름답게 흐른다. 입당과 말씀 전례, 성찬 전례가 시나브로 이어지고, 서울관구 대신학생들은 생활성가 ‘꽃’을 불러 교우촌 신자들의 환영에 감사를 대신하고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선물로 나눠준다.
김민수(베드로, 21) 신학생은 “빗방울이 흩날려 힘겨웠지만, 김대건 성인께서 걸으셨을 길을 따라 걷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면서 “환경은 많이 열악했지만, 중국 교회만의 특색 있는 미사에 함께할 수 있어 기뻤다”고 전했다.
박상렬(스테파노, 25) 신학생은 “중국에 오늘날까지 교우촌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고, 말만 들었던 교우촌 신앙의 열기를 느낄 수 있어서 인상이 깊었다”며 “김대건 성인, 최양업 신부님의 모범을 따라 저 자신의 선교의 길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한밤중이 다 돼서야 다시 길을 떠난다. 이 길의 끝에는 또 어떤 만남이 분단의 땅에서 온 신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조바자츠 교우촌은
지금은 중국에서도 몇 안 남은 유서 깊은 교우촌. 원래는 다바자츠(大八家子)와 조바자츠(小八家子)로 이뤄져 있었지만, 지금은 조바자츠만 남았다. 조바자츠가 한국 교회와 인연을 맺은 건 1838년 4월 만주와 몽골 전역을 관할하는 랴오뚱(요동)대목구가 설정된 것이 계기였다. 초대 랴오뚱대목구장 베롤 주교는 당시 바자츠에서 많은 토지를 사들여 성당과 신학교를 세워 만주 선교의 거점으로 삼았고, 파리외방전교회를 연결 고리로 자연스럽게 조선 선교의 거점도 됐다.
숱한 박해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주민들의 신심은 변함이 없다. 3000여 명 주민들은 성당 종소리에 맞춰 일상을 살아갈 만큼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복음화율도 98나 된다. 1885년 이후 130여 년간 40여 명의 사제를 배출, 성소의 못자리가 되고 있는 지린교구 첫 본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