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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거룩한 탄생

이창훈 알폰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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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알폰소




성탄(聖誕), 거룩한 탄생이다. 왜 거룩한 탄생인가.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참인간, 온전한 인간이었지만 또한 영원으로부터 계시하는 하느님의 외아들, 참하느님이셨다. 하느님과 본질이 같으신 하느님의 외아들이 사람이 되셨기에 거룩한 탄생이다. 거룩함은 하느님께만 해당하는 최고의 속성(屬性)이 아니던가.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사건, 거룩한 탄생은 인간의 눈에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아기는 화려한 왕궁에서 고관대작의 축하를 받으며 탄생하신 것이 아니다.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에서 부모와 친지의 축복 속에 태어난 것도 아니다. 여행 중이어서 길손이 머무는 여관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아기는 초라한 외양간에서 태어났고, 부모는 아기를 포대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소나 말이 먹도록 여물을 담아두는 여물통이 바로 구유다.

신비라는 표현을 쓰자면, 이것이 성탄의 신비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는데 그것도 가장 초라하게 외양간에 태어나 구유에 누워 계신다는 것이다. 이 성탄의 신비가 오늘의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 물음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의미를 깊이 되새기고 우리 삶의 기반으로 삼지 않는다면, 성탄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캐럴 속에 묻혀 흘러가 버리는 빈 기쁨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사건은 역설이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이 이야기하듯이 한없이 높아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속성이다. 더 가지려고, 더 채우려고, 더 높아지려고, 더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욕망이다. 그 결과가 죄요, 죽음이다. 그런데 창조주 하느님은 죄로 물든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의 지위로 자신을 낮추셨고 비우셨다. 이것이 역설이다. 이 역설이 오늘 우리에게 지엄한 명령으로 다가온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 권세가들, 지도자들, 부유한 이들은 내려오고, 낮추고, 비워야 한다. 그러나 내려오고, 낮추고, 비우는 것이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술수여서는 안 된다. 하느님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어주신 것처럼(요한 3,16 참조), 사랑이 깔려 있어야 한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마태 3,7) 하는 요한 세례자의 준엄한 질책이 그들 몫이 될 것이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또한 이제 사람이 하느님의 품위로 들어높여졌음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기에(요한 1,14 참조), 우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니 내가 만나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신분과 지위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재물과 명예와 권력의 있고 없음에 관계없이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여물통에 누워 있는 아기에서 구세주를 보듯이, 가장 버림받고 비천한 이들에게서도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이 신비를 일깨워 준다. 그래서 거룩한 탄생이다.

국정농단과 탄핵 정국의 난맥 속에 한 해가 저물어간다. 이 나라가, 우리 사회가 명멸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퇴보하지 않고 떠오르는 태양처럼 희망으로 다시 용솟음치려면 지금 성탄의 신비와 역설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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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6-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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