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일(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언제부턴가 멘토가 사라졌다. 한때 잘나가던 ‘국민 멘토’들이 대부분 추락하거나 버림받았다. 더러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스스로 잠적했다. 대중은 멘토를 버렸을까? 한때는 ‘멘토링’으로 추켜올리더니 이젠 ‘멘토질’로 깎아내린다. 청춘의 아픔을 위로하던 그들의 메시지는 듣기 민망한 ‘꼰대질’이 되어버렸다.
베스트셀러의 저자가 또 한 권의 책을 냈다. 몇 년 전 눈물을 흘리며 그의 책을 읽었던 이들이 이번엔 무참하게 조롱했다. 내용은 비슷한데도 악성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어제 환호와 갈채를 보내던 이들이 오늘은 야유와 조소를 던진다. 꽃다발을 바친 바로 그 손으로 이번엔 돌팔매를 던졌다. 대중은 우상을 만들고 또한 쉽게 버린다. 멘토의 몰락, 힐링의 종말이다.
청춘의 고뇌엔 정답이 없다. 혼돈의 시대에 길을 찾기는 쉽지 않다. 함부로 희망을 말하는 이여. 힐링은 상품이 아니다. 위로도, 치유도 그처럼 쉬이 얻을 수는 없다. 모두가 스승은 아니다. 누구나 예언자일 수도 없다.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니다.”(1코린 2,6)
희망은 절망의 끝에 위태롭게 걸려있다. 위로는 슬픔의 밑바닥에 눈물처럼 고인다. 고통의 근원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 위로는 마약일 뿐이다. 내면의 상처와 대면하지 못한 이에게 치유는 중독에 지나지 않는다. 가엾은 영혼은 끊임없이 힐링을 찾는다. 오늘은 여기로 내일은 저기로 기웃거린다.
그들의 언어는 감미롭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강연은 성황을 이룬다. 지혜의 샘물을 마셨을까? ‘현자의 돌’이라도 찾은 것일까? 어쩌면 너무 빨리 하산했는지 모른다. 운무 사이로 잠깐 눈부신 비경이 스쳤을 뿐이다. 그것을 초모랑마의 정상으로 착각했다. 진리의 정원을 거닌 것으로 확신했다. 돌아와 책을 쓰고 강연을 시작한다.
시대의 멘토는 불행하다. 어느 새벽의 깨달음이 그를 부추겼다. 첫발을 내디딘 바로 그 순간에 속된 욕망이 찾아들었다. 존경받고 싶은 욕망이 그를 유혹한다. 어렵사리 지혜를 얻고서, 그만 명예욕에 걸려 넘어진다. 무릇 존경과 명예를 탐하는 이 중에 참 스승은 없다. “나는 지혜롭다는 자들의 지혜를 부수어 버리고 슬기롭다는 자들의 슬기를 치워 버리리라.”(1코린 1,19)
진리의 산길은 종종 어둡다. 그곳엔 무지의 구름이 짙게 드리웠다. 신비를 목격한 사람은 그저 경탄할 뿐, 쉽게 표현하지 못한다. 말과 글의 한계 앞에 무력감을 느낀다. 명쾌한 답변을 조심하라. 유려한 가르침을 의심하라. 삶은 저마다 깊이 외롭고 고통은 아득히 뿌리가 깊다.
참 스승이 그리운 시대다. 노을 비낀 인생길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온유한 스승을 만나고 싶다. 그는 말과 글이 현란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어눌하고 어수룩할지 모른다. 말보다 침묵을 좋아하고, 글보다 삶을 중시하리라.
힐링은 사실 멀리 있지 않다. 낯선 곳을 찾아 떠나는 하루의 휴가에도 치유는 있다. 시골 성당에서 흘린 고해의 눈물 속에, 수도원에서 보낸 몇 시간의 침묵 속에 위로와 은총은 찾아온다. 홀로 걷는 순례길, 촛불 속의 성체조배, 거룩한 독서에도 힐링은 있다. “들어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갈 것 없다.”(룻기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