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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성 베네딕토의 숲

김소일(세바스티아노, 보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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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산길이 호젓하다. 다들 내려오는 시간에 나는 오른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다. 정상까지 갈 생각은 없다. 숲길을 걷는 것으로 족하다. 목표를 버리니 그제야 숲이 말문을 튼다.

젊은 날의 산은 내게 높이였고 속도였다. 암벽에 붙고 빙벽을 찔렀다. 불수도북(불암-수락-도봉-북한)을 하루에 주파하고 자신만만했다. 정상에선 늘 노래를 불렀다. “천왕봉아 눈 떠라 내가 왔단다. 산중군자 포효하라 내가 왔단다.” 그 시절 산은 도전이고 성취였다.

내 삶의 30대에 나는 ‘인생은 곧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로 승부를 걸었고, 일의 결과로 평가받기를 원했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었다. 날마다 벼리고 갈았다. 이따금 일이 아닌 인간관계로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다. 치사한 편법으로 보였다. 되도록 말을 섞지 않았다. 그 시절 인생은 실력이고 능력이었다.

멈췄다 오르고 쉬었다 걷는다. 등산로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아늑한 공간이 있다. ‘성 베네딕토의 숲’이다. 수도원이 내려다뵈는 이곳을 나는 그렇게 부른다. 오후의 햇볕이 마지막 온기를 전한다. 달궈진 바위는 아직 따듯하다. 등을 붙이고 누우면 까마귀 울음마저 정겹다. 저 새는 독이 든 빵을 물어 나르던 수비아코의 까마귀를 알고 있을까?

인생의 40대에 나는 세상에 좌절했다. 세상은 공정하지 않았다. 능력보다 관계가 중요했다. 편법이 쉽게 노력을 앞질렀다. 서 있을 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분노를 품은 채 마음을 닫았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세상을 피했다.

그즈음 산이 말을 걸어왔다. 더는 노래하지 않으니 비로소 산의 노래가 들렸다. 산은 누군가의 울음을 들려줬다. 어느 날 성 베네딕토의 숲에서 그를 만났다. 초라한 사내였다. 조연의 능력도 없으면서 주연을 탐냈다. 내면의 욕망을 솔직히 인정할 줄도 몰랐다. 뒤틀린 자아를 가식과 허위로 감싼 채 교만으로 자신을 위로했다. 세상보다 진부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탓했다. 그 사내가 나였다. 부둥켜안고 오래 울었다.

지천명을 넘기고서야 뒤늦게 깨달았다. 그 잘난 능력과 실력은 하찮았다. 세상에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교만한 자의 능력은 종종 세상을 해치는 독이었다. 필요한 것은 부족함이었다. 부족한 자의 겸손이 세상을 아름답게 했다.

가을 숲은 빠르게 옷을 갈아입는다. 지난주 노랗고 빨갛더니 어느새 누런 갈잎이 주종이다. 반쯤 잎을 떨어낸 나무가 겨울 채비를 서두른다. 계절의 순환 앞에 자연은 겸허하다. 황홀한 단풍마저 쉬이 내려놓는다. 움켜쥔 풍요로는 겨울을 건널 수 없음을 저들은 안다.

우수수 잎이 진다. 바람이 가지를 흔들며 속삭였다. 세상은 관계의 조화일 뿐이다. 낙엽이 저희끼리 부대끼며 소리쳤다. 관계는 편법이 아니다. 세상살이의 본질이다. 숲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겸손하라.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라. 어울려 사랑하라.

성 베네딕토의 숲에는 도토리나무가 많다. 굴참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가 지천이다. 단풍만큼 화려하지 않고 은행만큼 찬란하지 않다. 그래도 저 참나무 군단이 빚어내는 수수한 빛이 가을 산을 점령한다. 스러져가는 햇빛 속에서 연녹색 잎이 은은하다. 짧은 가을을 아쉬워하지 않고 미련 없이 갈색으로 돌아간다. 단풍도 은행도 갈잎도 마침내 흙의 색깔이다.

숲에 어스름이 내린다. 바위는 이미 차갑게 식었다. 이제 서걱거리는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나는 머리에 흙을 한 줌 끼얹고 숲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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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7-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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