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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년 등사본으로 출간된 「양봉요지」 원본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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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퀴겔겐 신부가 서울 백동수도원 농장에서 양봉 기술을 선보이고 있다. |
「양봉요지」 내용과 반환 과정
「양봉요지」는 1918년 독일인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가 지은 최초의 우리나라 양봉 교재다. 가로 13.2㎝, 세로 20.4㎝ 크기의 등사본(謄寫本)인 이 책은 모두 40장으로 구성돼 있다. 내용은 양봉 이론과 실습을 병행할 수 있도록 양봉 관리법과 주의할 점을 상세히 수록하고 있다.
2014년 헨네켄 신부가 독일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 도서관에서 「양봉요지」 출간 원본을 찾으면서 반환 논의가 시작됐다. 한글로 쓴 최초의 양봉 교재라는 책의 중요성에 비춰 한국으로 반환하는 것이 가능할지 왜관수도원과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 간의 논의가 본격화됐다.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는 2017년 10월 독일 상트오틸리아연합회 평의회 회의에 참석한 후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을 방문, 영구 대여 형식으로 「양봉요지」를 반환해줄 것을 미카엘 리펜 아빠스에게 공식 요청했다. 리펜 아빠스는 2017년 말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 장로회의를 열고 왜관수도원과의 형제적 협력 관계를 중시해 영구 대여 형식으로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양봉요지」 반환에는 왜관과 뮌스트슈바르자흐 두 수도원 간의 형제적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협력은 1909년부터 이어지고 있으며,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와 동료 37위’에 선정돼 있는 기게리히 수사와 게르네르트 수사 등 2명이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 출신이다.
미카엘 리펜 아빠스도 「양봉요지」 반환식에서 “왜관수도원과의 형제 관계 안에서 이 책을 왜관수도원에 영구적으로 맡기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100년 만에 이 책이 한국에 가게 됐는데, 하느님의 창조물인 벌들과 자연에 대한 사랑이 왜관에서도 꽃피길 기대한다”고 소망했다.
왜관수도원은 「양봉요지」의 존재가 알려진 후 여러 관계자와 함께 논의하면서 한국 반환을 추진해 왔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부터는 「양봉요지」의 적절한 반환 방식과 반환 이후의 학술 연구, 보존 방식, 영인본 제작 등과 같은 실무적인 도움을 받았다. 또 칠곡군과도 이 책의 반환을 위해 협력했다. 칠곡군은 우리나라 유일의 양봉 특구이고, 아카시아나무 최대 군락지로 매년 양봉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이 책이 알려지자 백선기(미카엘) 칠곡군수는 칠곡군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양봉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로쓰기 현대어로 해제본을 제작했고, 2017년 3월 리펜 아빠스가 왜관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이 책의 중요성에 대해 양봉 관련자들과 함께 설명하기도 했다.
이렇게 왜관수도원과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지자체 등이 서로 협력해 「양봉요지」 반환을 추진했고 그 결과 올해 1월 27일 독일 뮌스트슈바르자흐수도원에서 반환식을 거행하고 28일 국내로 들여왔다.
카니시우스 퀴겔겐 신부
카니시우스 퀴겔겐(Canisius K gelgen, 한국명 구걸근, 1884~1964) 신부는 1907년 10월 독일 파사우 인근 성 베네딕도회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 수도자로 첫 서원을 하고 1909년 7월 사제품을 받았다. 이후 1911년 1월 서울 백동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돼 후에 덕원수도원과 연길 성 십자가 수도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1911년부터 39년간 한국과 중국 연길에 체류하면서 선교와 교육 사업에 힘썼다. 퀴겔겐 신부는 1916년 한자음을 표기한 한국어 3000 어휘를 수록한 「요한덕해」 사전을 저술, 한국에 파견된 독일 선교사들이 한글과 한문 공부를 할 때 기본 교재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가 1928년 등사판으로 발간한 1350쪽 분량의 「독한사전」에는 4만 개의 독일어 표제어가 담겨 있다. 또 1931년에는 종교 어휘에 치중한 「한독사전」을 저술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으로 독일의 재정 지원이 끊어졌을 때인 1916년부터 수익성이 좋은 서양식 양봉을 시도해 수도원에 재정적 도움을 줬다. 1918년에는 「양봉요지」를 저술하고 양봉 강좌를 개설해 많은 한국인을 가르쳤다.
퀴겔겐 신부는 1921년부터 만주 팔도구, 육도포, 훈춘, 연길상시 본당 주임으로 사목하면서 성당 관할 공소마다 수십 개의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또 연길상시 성당에 수녀원을 마련해 처음으로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소속 수녀들을 초청했다.
1946년 연길수도원이 중국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면서 그는 동료 수도자들과 함께 남평수용소에 감금돼 고초를 겪었다. 이후 1950년 12월 독일로 귀환했고 6ㆍ25 전쟁이 끝나자 한국에 다시 와 1953년 12월부터 1955년 말까지 부산 독일 적십자병원 수석 통역사로 봉사했다. 퀴겔겐 신부는 1964년 숙환으로 선종해 슈바이클베르크수도원 묘지에 안장됐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