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았다. 개인적으론 어느덧 이순(耳順)이다. 저 말의 의미처럼 귀가 순해지진 않았다. 듣는 대로 이해가 된다거나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경지는 턱도 없다. 오히려 나이 들수록 옹졸해지는 게 아닐까 두렵다. 아직도 서운함과 노여움을 다스리지 못해 끙끙 앓는다. 혼자서 상처받고 세상과 섞이지 못한다. 이순은커녕 불혹이나 지천명도 아득히 멀다.
새해라고 뭐가 다를까. 지구가 태양 주위를 한 바퀴 더 돌았을 뿐이다. 2019년과 2020년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기해년과 경자년 사이엔 아무런 표지도 없다. 우주 공간에는 출발선도 결승선도 없다. 영겁의 시간은 인간의 작명과 셈법을 무시하고 그저 담담히 흐른다.
기쁠 일도 슬플 일도 아니다. 살아내야 할 또 한 해일 뿐이다. 새삼 생각노니 대체 시간이란 무엇인가. 돌아보니 삶은 길고도 길었다. 또 한 편으론 눈 깜짝할 새 흘러가 버렸다. 어이하여 시간은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가.
연말이면 예서제서 탄식이 들린다. “벌써 12월이네.” “세월이 정말 빠르군.” “한 해가 번개처럼 지나갔구나.” 나이 들수록 이런 느낌이 강해진다. 어찌하여 인간은 절대의 시간을 놓쳐버리고 저마다의 시계로 세월을 재는 것일까.
시간은 만만치 않다. 시간은 온 우주에서 균등하게 흐르지 않는다. 아인슈타인 이후로 과학은 시간의 절대성을 무너트렸다. 시간은 이제 엿가락처럼 늘어지기도 하고 고무줄처럼 줄어들기도 한다. 지구 위의 시간도 제각각이다. 평지에서는 느리게 흐르고 산꼭대기에서는 빠르게 흐른다. 탁자 밑과 탁자 위, 발끝과 머리끝의 시간이 다르다. 정밀한 기기로는 1cm만 달라져도 더디거나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잴 수 있다. 속도만 다른 게 아니다. 시간의 유일성, 독립성, 보편성, 연속성, 방향성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새해를 맞으며 의문을 품는다. 시간은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인간은 시간 앞에 몸부림치며 허공에 금을 긋고 날을 센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시편 90,12) 그러나 그분의 시간은 인간의 셈법과 다르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시편 90,4)
어쩌면 시간은 착각인지 모른다. 변화가 만들어내는 착시일 수 있다. 순간을 사는 인간은 영원과 절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기억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릴 뿐이다. 너와 나의 시간은 다르다. 공통된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창조주 앞에 외로이 서 있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오늘이 어제가 된다. 내일은 또 오늘이 된다. 그러니 오늘이 있을 뿐이다. 과거는 그분의 품으로 소멸해버렸고 미래는 아직 놓여나지 못했다. 인간에겐 오직 현재만 주어진다. 그래서 ‘현재’와 ‘선물’은 동의어다.
나이 들수록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아직도 뻣뻣하다. 감사할 일이 훨씬 많은데 나누고 베풀 줄 몰랐다. 자존심의 장막을 치고 용서와 사랑에 인색했다. 더 많이 내려놓아야 한다.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어렴풋이 깨닫는다. 약함 속에 은총이 있구나. 우리는 약할 때 오히려 강해질 수 있구나.
멀리 황혼이 보인다.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리라. 약함을 드러내고 도움을 청하리라. “아무것에도 흔들리지 마십시오. 아무것에도 놀라지 마십시오.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아빌라의 대 데레사 성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