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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생들, 교회 반대에도 3·1 만세 운동 적극 동참

▨ 103주년 3·1절 특집 / 일제 강점기 조선 교회와 3·1 독립 만세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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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경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와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신학생들은 교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립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사진은 2019년 3월 5일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 3·5 만세 운동을 기념해 대구대교구장 조환길 대주교와 교구 사제단, 대구가톨릭대학생들이 태극기를 손에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DB

 

 


“당신들은 선배 신부들같이 전교를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고 우리 민족을 억압하고 멸시하려고 온 것 같다. 월남 망국에 있어 전교 신부들이 프랑스 식민화에 앞장섰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 것 같다.”

1919년 3월 5일 저녁 대구 남산동 성 유스티노 신학교 운동장에서 “독립 만세”를 외쳤던 김구정(이냐시오) 신학생이 이 일로 퇴학 처분을 당하자 교장 신부에게 한 말이다.



정교분리 내세워 만세 운동 금지

1919년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 교회 사제 수는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와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를 포함한 프랑스 신부 44명, 한국인 신부 23명 등 모두 67명이 있었다. 국적에 상관없이 대부분 성직자는 ‘정교분리’ 원칙과 ‘선교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신자들의 만세 운동 참여를 반대하고 금지했다. 심지어 뮈텔 주교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이 운동에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기존 정부에 대한 충성의 모범을 보였다”고 평했다. 드망즈 주교도 “일본 정부는 합법적 정부이므로 우리 천주교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며 정당화했다. 프와요 신부는 “조선 독립을 소망하는 것은 헛된 기다림이고,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한국인 신부들의 인식도 프랑스 선교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종순 신부는 “조선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에 신자들이 만세 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신학생들은 달랐다. 당시 한국 교회에는 경성대목구에 예수성심신학교가 대구대목구에 성 유스티노신학교가 12년 과정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만세 운동은 대구 성 유스티노신학교에서 먼저 일어났다. 성 유스티노신학교에 재학 중이던 대신학생 11명과 소신학생 46명은 1919년 3월 5일 저녁 학교 운동장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해성학교 교사 김하정(루카)과 신학교 교사인 홍순일이 주도했다. 신학생들은 또 3월 9일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고, 오후에 약전골목에서 열릴 만세 시위에도 참여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김하정의 동생인 김구정 신학생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서정도 신학생이 태극기를 제작하기로 했다. 안타깝게도 한 신학생의 고발로 학교 당국에 발각돼 시위 합류는 무산됐다. 대구 신학생들은 4월 3일 다시 한 번 만세 운동을 시도했으나 실현하지 못했다. 이 일로 홍순일 선생은 파면되고, 신학교는 5월 1일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김구정은 여러 차례 퇴교 조치와 권유를 받다 1921년 자퇴했고, 서정도는 1923년 사제품을 받았다.



만세 운동 주도 신학생 퇴학 조치

경성 용산 예수성심신학교 신학생들은 1919년 3월 23일 주일 밤에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인근 용산 삼호정과 새남터에서 군중이 독립 만세를 외치자 신학생들은 창문을 열고 함께 만세를 불렀다. 일부 신학생들은 교문 밖으로 뛰어 나가 만세 운동에 합류했다고 한다. 이 일로 다음날 경성대목구장 뮈텔 주교가 신학교로 달려왔다. 신학생들은 뮈텔 주교에게 “나라가 학대받고 있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다”며 발을 구르고 눈물로 만세 운동 동참 허락을 호소했다. 하지만 주교는 단호했다. “만세 운동을 하려면 신학교를 나가라”고 했다. 그리고 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신학생들을 퇴학시켰다.

그중 한 명이 풍수원본당 출신으로 8학년생 박 마르코 신학생이었다. 박 마르코 신학생의 형 박 요한은 이에 항의해 당시 풍수원본당 정규하 신부에게 찾아가 “유럽인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8년 동안이나 신학교에서 공부한 내 동생을 저들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급기야 내쫓았다. 저들은 얼마나 사악하고 정의롭지 못한가!”라고 항의했다.

3ㆍ1 만세 운동 때 신학생들은 어떻게 당시 성직자들의 인식과 달리 ‘암울한 시대의 예언자’로서 만세 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을까? 사학자들은 우선, 호교론을 내세운 사제들과 달리 사회 현실 참여를 자각해 민족혼을 일깨워주던 평신도 조선인 교사들이 신학교에 있었다는 점을 주목했다. 또 ‘각 민족은 정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고 주창한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프랑스 선교사가 ‘독립 의식’ 고양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3ㆍ1운동 연구 권위자인 윤선자(전남대 사학과) 교수는 무엇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참전하는 모습을 신학생들이 지켜보면서 직ㆍ간접적으로 ‘독립 의식’을 고양한 것이 주효했다고 지적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종식과 세계 평화를 위해 노력한 베네딕토 15세 교황은 3ㆍ1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 상해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 서한을 보내 “조선 교회의 자녀들이 받는 핍박을 우려하며 속히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축복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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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2-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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