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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보성체수도회 김보현 수녀(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와 진은희 수녀(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리고 착한 사마리아인의 집 가족들이 직접 만든 초를 들고 있다. 가운데 수도복을 입은 사람은 실습 중인 박보나 수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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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사마리아인의 집 김보현 수녀가 남아공 출신 아코나씨와 함께 천연 초를 만들고 있다. |
“원래 이주민들과 떡볶이집을 할까 했어요. 그런데 주변에 학교가 많다 보니 경쟁이 심하더라고요. 그래서 교회 울타리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선택했죠.”
팔팔 끓여 녹인 밀랍을 원기둥 초 틀에 붓던 김보현(로사, 인보성체수도회) 수녀가 웃으며 말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9월 25일)을 맞아 김 수녀를 만난 곳은 경기 의정부시 가능동의 한 오래된 주택. 그와 같은 수도회 진은희(엘리사벳) 수녀가 운영하는 이주민ㆍ난민 쉼터 ‘착한사마리아인의 집’의 초 작업장이다. 두 수녀는 쉼터에 사는 이주민ㆍ난민과 함께 지난해부터 이곳에서 밀랍과 콩 등으로 천연 초를 만들어 팔고 있다. 이방인인 이들에게 한국에서 노동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현재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이집트와 우간다 등 아프리카 국가에서 박해를 피해온 난민신청자 4명. 홀몸으로 아기를 돌봐야 하는 미혼모, 시력을 잃어가는 희소병 환자 등 다들 온전한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처지다. 초 판매금은 이들의 인건비와 경제적으로 어려운 난민 청년들에게 주는 장학금으로 쓰인다.
착한사마리아인의 집의 모토는 바로 ‘노동하며 현존하며’. 이에 걸맞게 두 수녀는 인보성체수도회에서 최초이자 유일하게 수도복 대신 사복을 입고 ‘노동자’로 살고 있다. 초를 만들기 전에는 생수와 마스크ㆍ봉제공장 등에 취업해 직접 돈을 벌었다. 착한사마리아인의 집을 만든 이유도 공장에서 이주노동자를 만나 그들의 아픔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계기는 2020년 김보현 수녀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해외 선교를 못 가게 되면서였다.
“본원에서 대기하면서 고민했어요.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괴로워하는데, 사람들을 만날 방법이 없다. 뭘 해야 될까.’ 문득 가장 낮고 힘든 이들이 이주노동자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저도 노동자가 되기로 했죠.”
그해 5월 포천에 방을 구해 생수ㆍ 마스크공장 등에 다닌 김 수녀는 12월 의정부로 거처를 옮겼다. 인구가 더 많고 교통이 발달한 까닭이다. 헌 옷을 분류해 동남아시아 등 해외로 수출하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집값이 저렴한 가능동에 보증금 150만 원, 월세 18만 원짜리 단칸방도 구했다. 다락이 있는 오래된 방이었다. 그러던 중 지난해 1월 집주인이 “건너편 방이 비었는데 시설이 더 나으니 옮겨보라”고 제안했다. 김 수녀는 그 방을 빌려 자신이 사는 대신 이주민과 난민을 위한 쉼터를 마련키로 했다. 대신 도움이 필요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은희 수녀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일손돕기를 자원했다. “사실 이주민이나 난민에 대해 잘 몰랐어요. 근데 수도생활을 10년 넘게 하다 보니 어느덧 미지근해진 저 자신이 보이더라고요. 착한사마리아인의 집에 오면 다시 한 번 열정적으로 살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었어요.”
그렇게 동년배인 두 수녀는 지난해 2월부터 ‘짝꿍’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 일해서 모은 돈으로 차근차근 방을 하나씩 더 빌려 쉼터를 늘렸다. 중고거래 앱 ‘당근마켓’을 뒤져 쓸만한 세간살이도 갖춰 놓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쉼터는 모두 4곳. 작업장과 같은 골목에 있다.
혈혈단신으로 우리 사회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장 낮은 이웃, 난민들. 그들에게 보금자리와 일자리를 제공하는 착한사마리아인의 집은 그야말로 ‘생존의 공간’이다.
이학주 기자 goldenmouth@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