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벨기에 브뤼셀 유럽의회 건물(제2의사당)에 설치된 성탄 구유. CNS |
유럽연합(EU) 의회는 최근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의회 건물(제2의사당)에 성탄 구유 설치를 허가했다. EU가 1993년 출범 이후 건물 내부에 종교적 상징물이나 장식품 설치를 허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의회 본부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있지만, 본회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의회 활동은 브뤼셀에서 이뤄진다.
유럽의회는 ‘올해에 한 해 특별히’라는 단서를 달아 설치를 허가했다. 이런 이례적 허가에 대해 “공격적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potentially offensive)”이라고 우려한 의원도 있다고 스페인의 가톨릭 통신(CNA)이 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럽연합은 법령과 조약, 정책에서 종교에 관한 일체의 것을 배제하고 출범한 기구다. 유럽 문화와 전통의 뿌리는 그리스도교이지만, EU 헌장과 강령 어디에도 그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극단적 정교분리 또는 세속주의의 결과다.
이번 구유 설치는 스페인 출신 이사벨 벤주메아 의원의 노력으로 가능했다.
2019년 유럽의회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성탄절이 다가와도 썰렁하기 그지없는 건물 내부에 성탄 장식을 하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예수 탄생 장면이 비신자들에게는 공격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1년 전에도 같은 의견을 냈지만 관료주의의 벽에 막혀 낙담했다. 다행히 올해는 몰타 출신인 로베르타 메촐라 의장이 적극 나서준 덕분에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그는 “유럽이 그리스도교 뿌리를 무시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며 “그런 의미에서 구유 설치는 내게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 됐다”고 말했다. 전시된 구유는 목공예 전통이 깊은 스페인 남동부 무르시아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EU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운 데 대해 여러 차례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냈다. 교황은 2016년 EU에 보낸 메시지에서 “유럽은 그리스도교 정신으로 점철된 자신의 거대한 자산이 박물관 유물인지, 아니면 아직도 문화에 영감을 주고 전 인류에게 내어줄 수 있는 보물인지 숙고해야 한다”며 ‘유럽의 정신’에 대한 성찰을 촉구했다.
앞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유럽 헌법 조약을 작성하는 사람들이 “유럽의 종교 유산, 특히 그리스도교 유산에 대한 언급을 조약에 포함하길”(권고 「유럽 교회」 114항) 호소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유럽 통합은 전적으로 경제적 측면에서만 이뤄졌을 뿐 정신적 기반에 관한 문제는 (…) 완전히 배제되고 말았다”(「미래의 도전들」 133쪽)고 통탄한 바 있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