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삶과 신앙
▲ 가톨릭 신앙의 기초를 가르치는 교사이자 수호자로서 로마 가톨릭교회를 이끈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600여년 만에 사임한 교황으로 역사에 기록됐다. 교황이 2008년 4월 20일 뉴욕 양키 스타디움에서 미사를 집전한 후 신자들을 축복하고 있다. |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독일 출신으로 본명은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Joseph Alois Ratzinger)이다. 교황 즉위 당시 78세였던 그는 1730년 클레멘스 12세 교황 이후 275년 동안 선출된 교황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교황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또 1415년 사임한 그레고리오 12세 교황 이후 598년 만에 임기 중 완전한 자유의사로 스스로 사도좌에서 내려온 교황이다. 더불어 재위 기간은 8년이지만 95세로 역대 최장수 교황이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또 현시대 최고의 신학자, 정통 교리의 수호자였다.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승자로 현대 세속주의와 물질주의, 반 생명주의 문화의 혼돈 속에서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는데 헌신했다.
▲ 요제프 라칭거(오른쪽 두 번째 줄)가 1951년 7월 8일 여동생 마리아, 형 게오르크, 어머니 마리아, 아버지 요제프와 함께 찍은 사진. |
▨유소년ㆍ청소년기
베네딕토 16세 교황 곧 요제프 라칭거는 1927년 4월 16일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인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 라칭거와 어머니 마리아 파인트너, 형 게오르그, 누나 마리아와 함께 그는 완전한 가톨릭 배경의 가정에서 자라났다. 교황은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표현했지만 태어난 지 4시간 만에 세례를 받을 만큼 가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다. 청렴하고 정직한 이였다. 아울러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다. 평일 미사는 물론 주일에는 새벽ㆍ교중ㆍ낮 미사 모두를 참여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 자상한 성품을 지닌 어머니가 딱딱한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가족의 삶은 가톨릭 신앙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가족 모두 식사 때마다 기도했고, 매일 미사에 참여했으며, 묵주기도도 날마다 함께 바쳤다.
교황의 가정은 빈곤하진 않았지만 어릴 적부터 절약하면서 수수하게 살아야 했다. 교황은 “부유함 속에서 찾을 수 없는 즐거움이 바로 여기에서 생겨난다. 가족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기뻐할 수 있었다. 서로를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고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집안의 많은 사제와 수도자를 보며 자란 교황은 “이상하게도 하느님이 제게 무언가를 바라시고, 기대하신다는 것을 느꼈다”며 “그것이 사제직과 연결돼 있음을 확신했다”고 자신의 성소에 관해 밝혔다. 그래서 그는 12살이 되던 해인 1939년 트라운스타인 소신학교 입학했다.
교황은 1943년 독일 나치 청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에 강제 입회했다. 유겐트 가입은 저항할 수 없는 시대 상황이었다. 그나마 신학생들은 여러 훈련에 열외됐다. 하지만 전세가 기울자 트라운스타인 신학생들은 모조리 뮌헨의 고사포 부대로 징집됐다. 16살이던 그는 측량 소대에 배치돼 1944년 9월까지 1년 남짓 복무했다. 연합군 전투기를 추적해 비행 정보를 포대원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소년 라칭거는 1944년 가을 제대 후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2달 동안 노역 의무에 동원됐다. 전쟁 말기에 미군 포로가 돼 포로수용소에서 생활하다 1945년 6월 19일 풀려났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9년 7월 6일 회칙 「진리 안의 사랑」 사본에 서명하고 있다. 교황은 회칙에서 글로벌 경제위기와 빈곤, 환경파괴 등 현대 세계가 직면한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진정한 인간 발전을 위한 시민 사회의 연대와 형제애, 인류 가족의 국제적 협력에 이르기까지 여러 측면의 미래적 전망을 제시했다. |
▨ 사제이자 진보 신학자
라칭거는 1947년 뮌헨대학 부속 헤르초글리헤스 게오르기아눔 신학교 재입학했다. 신학교로 돌아온 그는 신학과 철학, 문학에 빠져 지냈다. 신학은 그를 평범한 그리스도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따르는 주님의 제자로 변모시켰다. 신학은 신앙과 사상의 지평을 넓혀줬고,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에 대한 해답을 제시했다.
1951년 24살 나이로 독일 프라이징에서 사제품을 받은 라칭거는 뮌헨-모자크 성 마르틴 본당 보좌 신부로 첫 사목을 했다. 이후 그는 1953년 뮌헨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나벤투라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보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기울었다. 1953년 성 아우구스티노, 1957년 성 보나벤투라의 계시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신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1954년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에서 교의 신학ㆍ기초 신학 교수로 강단에 선 라칭거는 젊은이들 말에 귀를 가장 잘 기울이는 젊은 신부로 인기를 끌었다. 그는 교과서를 정리해 간결하게 지식을 전달만 하는 교수가 아니었다. 가능한 한 많은 강의 소재들을 현실 관계 속에서 질문으로 만들어 학생들에게 던져줬다.
그는 프라이징ㆍ본ㆍ뮌스터ㆍ튀빙겐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만 해도 개혁 진보 성향의 신학자로 통했다. 교의 신학과 기초 신학을 강의했는데 강의실은 늘 학생들로 빼곡했다. 그는 학생들과 솔직성과 관용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또 한스 큉 신부와 함께 교황청 책임자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며 교회의 권위주의를 서슴없이 비판했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30대의 젊은 신학 교수 신부였던 라칭거는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하자 독일 쾰른대교구장 요제프 프링스 추기경의 신학 자문위원 자격으로 공의회 모든 회기에 참여했다. 그는 독일어권을 대표해서 개혁과 쇄신을 촉구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훗날 교회 안에서는 “라칭거가 참석하지 않았더라면 공의회가 쇄신의 씨앗을 뿌리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라칭거는 교황 즉위 후 “세계 모든 종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 신앙과 이성의 관계, 특히 현대 세계에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한 이해는 공의회 당시 가톨릭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과제들이었다”며 “우리는 공의회에 참여하며 마치 새로운 성령께서 오시는 듯 가슴이 벅찼다”고 회고했다.
라칭거 신부는 공의회에서의 활동 경험을 토대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내기도 했다. 이 해설서에서 그는 “개혁과 쇄신의 방향으로 공의회를 이끌려는 동반자들이 많았고 주교들 사이에서도 기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롭고 자유로운 시도를 감행해 보자는 의지가 강했다”고 썼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추기경 시절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
▨삶의 반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여해 교회 개혁과 쇄신을 촉구했던 라칭거 신부는 1968년 독일 대학가는 물론 유럽을 휩쓸던 네오마르크시즘의 광풍을 목격하면서 보수 성향으로 돌아섰다. 학생들이 강의실을 점거하고 자신의 강의 내용을 대놓고 비판하는 수모를 겪은 그는 이때부터 바뀌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옷을 걸치고 있는 광신적 이데올로기의 폐해를 절감했다.
라칭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과 쇄신 정신이 도전받고 있는 것을, 신앙과 교회가 전혀 다른 생각과 이념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 일들이 벌어지는 수년간 자유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했고, 누군가가 나서서 교회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후 그는 교회가 세속주의와 무신론에 위협받지 않고, 또 시류에 영합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통 가르침에 충실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활동했다. 그는 1969년 튀빙겐에서 레겐스부르크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교의 신학 교수로서 확고한 명성을 다져갔다. 또 그해 폴란드의 카롤 보이티와(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와 처음 만나 서로 통해 뜻을 같이하기로 했다.
▨진리의 협조자
라칭거 신부는 1977년 3월 성 바오로 6세 교황으로부터 독일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5월 주교품을 받고 대주교로 승품됐다. 또 한 달도 안돼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라칭거 추기경의 사목 표어는 ‘진리의 협조자’였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1년 라칭거 추기경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2005년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24년간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활동하며 성 요한 바오로 2세를 보필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신앙교리성 장관직을 수행하면서 엄격한 교리 해석으로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수호했다. 가톨릭교회를 흔드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 한치의 타협도 허용하지 않는 강인한 면모를 보였다.
그는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고수하기 위해 가톨릭교회 표준 교리서인 「가톨릭교회 교리서」 간행 작업을 주도했다. 낙태ㆍ동성애ㆍ인간 복제ㆍ이혼 등 사회 문제부터 여성 사제 임명ㆍ사제 독신제 폐지ㆍ해방 신학과 같이 교회 윤리와 전통에 반하는 주장에 단호했다.
그가 ‘철갑 추기경’ ‘하느님의 충복(忠僕)’ ‘요한 바오로 3세’라는 별명을 얻은 것도 20세기 말 사상과 문화 혼돈 속에서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을 지키려 한 노력에서 비롯됐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5년 4월 19일 교황으로 선출된 후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발코니에서 광장에 모인 신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문장은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서 주교 역할을 강조하는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
▨ 베네딕토 16세 교황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2005년 4월 19일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됐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선종 후 52개국 추기경 115명은 콘클라베(추기경단 비밀회의)를 열고 이틀 만에 4차례 투표로 라칭거 추기경을 새로운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로 선출했다.
라칭거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 이름을 ‘베네딕토 16세’라고 정하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말씀을 인용해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께 문을 활짝 열자”고 첫 인사를 했다.
그해 4월 24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즉위 미사를 봉헌하고 사도좌에 공식 착좌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선임 교황들을 따라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사목 방향을 밝혔다. 또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임을 거듭 천명하면서 그 빛을 두려움과 불안, 미래에 대한 의구심에 시달리는 현대 인류에게 전해야 하는 것이 교회 임무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특별히 교회 일치에 대한 강력한 염원을 피력하면서 인류의 참다운 발전을 위해 협력하고 다른 문화와의 대화를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베네딕토 16세는 여전히 원칙을 강조하는 가톨릭 신학자로 평가받지만,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평화의 사도로서 교황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교황은 원칙을 고수하면서도 다름을 이해하며 다가갔고, 기존 가르침을 지키면서도 차이를 인정하고 대화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을 현대 교회의 나침반으로 삼아 교회 쇄신과 개혁에 주력했다. 무엇보다 그는 ‘선교’와 그리스도인의 ‘새 복음화’에 힘을 쏟았다. 특히 유럽 교회의 새 복음화에 온갖 정성을 다했다. 그가 교황 이름을 유럽 교회의 수호성인인 ‘베네딕토’에서 따온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교황은 “현대 교회의 우선 과제는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리는 것”이라며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다시 드러내는 사명에 새롭게 눈떠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또 교회의 참된 쇄신과 개혁은 시노드나 사제 회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사람이 될 때 달성된다면서 신자 개개인과 가정, 사회 복음화에 전력했다.
교황은 해외 사목 방문을 통해 가정과 생명, 화해와 용서, 평화의 가치를 전 세계에 전파했다. 물질 만능주의와 세속화에 젖은 현대인들에게 가톨릭 전통과 문화의 소중한 가치들을 일깨우며 새 복음화의 씨앗을 뿌렸다. 또 교황은 “교회는 젊은이들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며 젊은이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시했다.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에도 노력했다. 교황은 감리교와 의화 논쟁을 종식했고, 유다교 시나고그와 이슬람 모스크를 찾아가 화해와 평화를 촉구했다.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수장들과도 잇달아 만나 형제의 친교를 나눴다. 또 교황령 ‘성공회 신자 단체’를 발표, 성공회의 영적ㆍ전례적 전통을 보존하면서도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친교를 이룰 수 있도록 한 교회법의 틀을 마련했다. 2009년에는 가톨릭교회로 돌아온 성공회 신자들과 성직자들을 받아들였다.
정의ㆍ평화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호 이해에 바탕을 두고 다양한 사람들과 계속 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교황은 정치ㆍ종교 분쟁으로 얼룩진 세계 곳곳에 평화와 화합의 중재자로 적극 나섰다. 교황은 2009년 요르단ㆍ이스라엘ㆍ팔레스타인을 사목 방문하고, 2010년에는 로마에서 중동 주교시노드 특별회의를 개최했다. 중동 현실을 직접 대면하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에 귀를 기울였다. 교황은 외교 관계가 단절된 중국과 쿠바 등과도 관계 개선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2007년 중국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고, 중국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5월 24일)을 제정하는 등 중국 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쏟았다. 2008년 교황청 산하에 중국 교회 문제를 연구하는 ‘중국 교회 특별위원회’를 직접 설립하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유럽과 미주 지역에서 잇달아 터져 나온 사제 성추행 사건으로 곤경에 처하기도 했다. 교황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용서를 구하며 가톨릭교회 잘못에 대해 대중 앞에 머리 숙여 사죄했다.
▲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은퇴 후인 2014년 4월 27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성 요한 23세 교황 시성식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 포옹하고 있다. |
▨ 사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2013년 2월 11일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 축일에 교황직을 사임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교황은 이날 “이 행위(교황직 사임)의 중대성을 잘 의식하고 완전한 자유로 베드로 성인의 후계자인 교황의 직무를 사퇴한다”고 선언했다.
“완전한 자유의사로 교황직 포기를 선언한다”는 이 말이 베네딕토 16세의 교황직 사퇴가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교회법은 “교황이 그의 임무를 사퇴하려면 유효 조건으로서 그 사퇴가 자유로이 이루어지고 올바로 표시되어야 하지만 아무한테서도 수리될 필요는 없다”(332조 2항)고 규정하고 있다.
베네딕토 16세는 자신의 사임이 건강상 이유임을 밝혔다. 교황직 사임은 “도피가 아니라 봉사직에 충실히 머무는 또 다른 방식”이라고 했다. 교황은 2012년 보낸 긴 휴가 중 오로지 하느님과의 대화를 통해 사임이라는 중대한 결심을 내렸다고 했다. 베네딕토 16세의 사임 발표에 교회는 물론 전 세계가 당혹감과 충격을 금치 못하면서도 교황의 용기 있는 결단에 존경과 지지와 감사를 표시했다.
교황은 사임 발표 후 여름 집무실이 있는 카스델 간돌포로 옮겨가 새 교황이 선출될 때까지 지내다가 프란치스코 교황이 새 교황으로 선출된 후 다시 바티칸으로 돌아와 ‘교회의 어머니’ 봉쇄 수도원에서 생활하다 2022년 12월 31일 선종했다.
▨약력
△1927년 4월 16일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인 출생
△1939년 트라운스타인 소신학교 입학
△1947년 뮌헨대학 부속 헤르초글리헤스 게오르기아눔 신학교 입학
△1951년 사제 수품, 뮌헨-모자크 성 마르틴 본당 보좌신부
△1953년 뮌헨대학교 신학박사 학위 취득
△1954~57년 프라이징 철학-신학대학에서 교의 신학ㆍ기초 신학 교수
△1959년 본 대학 기초 신학 정교수, 부친 사망
△1962~65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신학 전문 위원 활동
△1963년 뮌스터대학 교수, 모친 사망
△1966년 튀빙겐대학 교의 신학ㆍ 교의사학 정교수
△1969년 레겐스부르크대학 교의 신학ㆍ교의사학 정교수
△1976~77년 레겐스부르크대학 부총장
△1977년 3월 24일 뮌헨 프라이징 대교구장 임명
△1977년 5월 28일 대주교 수품
△1977년 6월 27일 추기경 서임
△1981년 11월 25일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
△2002년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으로 임명
△2005년 4월 19일 제265대 교황으로 선출
△2013년 2월 28일 교황직 사임
△2022년 12월 31일 선종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