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하시면서 가톨릭 신앙대로 하시기 쉽지 않으시지요?”
“아니오. 주님 말씀대로 하면 되는 일이 많아요.”
내가 가톨릭 신자임을 안 사람들이 내게 질문하고 나는 답을 하느라고 마주하면 첫머리에 대부분 등장하던 대화다.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라는 생각 때문에 이런 선입관이 생긴지 모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기업의 활동은 단순히 이윤 추구만은 아니다. 고용을 포함한 사회에 대한 책임도 있고 다양한 목적과 기능을 갖고 움직이는 집단이다. 나 또한 오랜 시간 기업인으로 살아왔다. 기업인으로서 하는 많은 일들 속에 “신앙이 있어 참으로 좋구나!” 생각한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일까요?” “어떻게 하면 믿을만한 사람을 많이 확보할 수 있을까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으면 경영이 편해진다. 실수와 실패도 적어지고 견제하고 감시하는 수고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 친구 믿을만해?”
아주 흔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늘 비슷한 말들이 반복되곤 한다.
“물론입니다. 그 친구와 저희 매형이 한동네에서 쭉 살았습니다. 동네 사람인 거죠. 믿으셔도 됩니다.” “네 그 친구 믿으셔도 괜찮습니다. 제가 그 친구와 중고등학교 6년을 같이 다녔습니다.” “그럼요 그 친구 믿을만합니다. 제 사촌 누이가 그 형과 결혼을 해서 집안 간에 잘 아는 사이입니다.”
들어보면 안심이 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돌아보면 결국 지연ㆍ학연ㆍ혈연의 인연이 있으니 믿어도 괜찮다는 답이다. 물론 이런 인연이 있으면 사람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니 판단이 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업이나 조직에서 이러한 지연ㆍ학연ㆍ혈연에 의한 신뢰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수도 없이 증명되어 왔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는 그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어떤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일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믿을만한 사람이 조직 내에 많아지게 할 수 있을까? 나도 수없이 고민했던 명제다. 그런데 그 답은 신앙 속에 있었다.
“믿을만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실수를 무조건 가리고 덮지 않으니 그 사람이 한 일은 잘되고 못 되고를 투명하게 알 수가 있다. 잘못한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이야기하면 다시 반복되지 않게 자신이 깨닫고 배우는 기회를 갖도록 하면 된다.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설사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신용과 지속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사람이다. 실적 위주의 냉혹한 평가와 무한 경쟁에 노출되다 보면 약속보다 실적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신앙에서는 이미 이 실수를 인정하고 약속을 지키는 삶을 살아야 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고해성사만큼 실수를 인정하는 강력한 수단이 또 있을까? 하느님과의 약속을 매일 기도로 다짐하고, 죽음을 넘어선 부활까지의 약속보다 강력한 약속이 있을까? 가톨릭 신앙은 이처럼 실수를 인정하고 약속을 지키는 믿을 만한 사람을 길러내도록 늘 가르치고 있다. 이렇게 설명하면 다음 질문이 이어진다.
“그러면 그런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을 많이 뽑으면 되지 않을까요?” “아닐 거야. 좋은 품성을 가진 사람도 나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기업의 운영방식이야.”
아무리 좋은 품성을 가졌어도 기업의 운영규칙이 가혹해서 실수를 저지르면 과정과 원인에 상관없이 처벌과 불이익을 주게 되면 누구나 실수를 덮어 버리게 된다. 생존이 앞서는 조직운영 탓이다. 아무리 실무자가 외부 이해 관계자와 약속을 했어도 실적지상주의에 끊임없이 몰리다 보면 생존을 위해 실적을 택하고 약속을 버릴 수밖에 없어진다. 다시 말하면 실수를 인정할 수 있게 해주고 약속을 지킬 수 있게 조직운영을 하면 신뢰할만한 사람이 많아지고, 가혹하고 단기 실적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평가하게 되면 품성이 좋던 사람도 실수는 감추고 약속은 버리게 된다.
그런데 하느님은 우리가 고해성사에서 끊임없이 실수를 인정하고 죄를 고해도 늘 용서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라고 무한한 사랑을 주신다. 약속을 지키라고 늘 기도하게 만드시고 그 약속의 결과를 우리의 생명을 넘어 천국에서 보여주신다. 하느님 보시기에 믿을만한 사람이 되라고 이렇게 사랑으로 감싸주시니, 참으로 탁월한 경영자이심에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