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들이 나서 야당 지지했지만, 국민 표심 움직이는 데 실패
필리핀 대통령 선거가 끝난 지 6개월이 넘었지만 성직자들은 선거 후유증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대선 당시 소크라테스 빌레가스 추기경을 비롯한 많은 성직자가 야당 후보 레니 로브레도를 지지했다. 하지만 국민들은 경쟁 상대인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를 선택했다. ‘봉봉’이라는 별칭을 가진 마르코스 주니어는 철권통치를 휘두르다 1986년 ‘피플 파워(민중의 힘)’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난 마르코스 전 대통령의 외동아들이다. 값비싼 보석과 구두 수집으로 비난을 받았던 ‘사치의 여왕’ 이멜다 여사가 그의 어머니다.
교회법상 성직자는 정치활동이나 선거운동 전면에 나설 수 없다. 그럼에도 성직자들, 심지어 주교회의까지 반 마르코스 대열에 합류한 이유는 대선 구도를 ‘선과 악의 대결’로 봤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독재 정치를 미화하고, 마약 소탕을 빌미로 인권 유린을 일삼은 두테르테 대통령과 연합한 봉봉 마르코스를 악의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1980년대 피플 파워를 이끈 민주화 진영은 독재자 가문의 부활을 막아야 한다고 외쳤다.
피플 파워의 상징 하이메 신 추기경의 비서였던 빌레가스 추기경은 “가톨릭 신자는 선과 악 사이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다”며 선의 편에 서라고 호소했다. 주교회의도 성명을 통해 마르코스 캠프가 독재와 부패의 역사를 ‘세탁’하는 것을 비난했다. 수많은 성직자가 로브레도 후보 지지자임을 드러내는 분홍색 셔츠를 입고 같은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봉봉 마르코스 58, 로브레도 28였다.
성직자들은 두 배가 넘는 표차에 대해 “민심은 천심(Vox Populi, Vox Dei)인데, 이 결과가 정말 우리가 따라야 할 하늘의 뜻인가”라며 충격을 금치 못했다. 지금도 이런 탄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정치에 대한 냉소적 분위기도 가라앉지 않고 있다.
민주화 진영의 패배 원인은 다양하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19로 더 힘겨워진 경제와 민생 관련 공약을 쏟아낸 후보에게 표가 쏠렸다는 것이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어두운 과거를 들춰내 무엇하겠느냐는 정서였다고 볼 수 있다. 혼란이 끊이지 않고 속도가 느린 듯한 민주적 리더십에 대한 실망감도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