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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곤의 불편한 이야기]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신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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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야기는 금지. 어길 시 퇴장 조치!” 친구들과의 SNS 단체대화방에 올라있는 경고사항이다. 누구나 대화방에서 이런 경우를 한두 번쯤 접해보았으리라. 어떤 집에서는 형제 친척이 모일 때도 정치나 선거 얘기는 금지라던가.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이 낯을 붉히고 언성 높이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일 것이다. 나는 애초에 내 정치적 선택을 가지고 식구들을 설득하는 일을 포기했다. 못된 아들놈, 못난 오빠로 찍혀있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치 이야기 금지’는 교회에서도 암암리에 통용되는 규칙이다. 성당의 공적인 모임에서뿐 아니라 구역 모임이나 사적인 만남에서도 다들 정치 이야기는 알아서 입 다문다. 미사 강론 때 신부님에게서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지가 아마득하다. 신자 떨어져 나갈까 걱정해서인가? 그렇게 믿고 싶지는 않으나 교회가 정치 무풍지대인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왜 사목회의 결과를 단숨에 뒤집곤 하는 사제의 권력은 성역처럼 남아있을까. 교회 안에 민주주의는 없다. 신앙을 정치에 초연한 무엇으로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개신교는 말할 것도 없고 천주교 역시 갈수록 신앙이 개인화되고 내면화되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다. 신앙을 정치나 사회적 조건에서 벗어난 내면의 문제로 치환해온 뿌리는 깊다. 고결했던 신부 루터가 고해성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정결해진 자신의 마음에서 교만을 발견하고는 그 길로 돌아가 다시 고해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막스 베버가 개인의 선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부’라는 이름의 현세적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구원관을 들어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설명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앙을 이렇게 개인의 내면적 문제로만 돌리는 것도 하나의 정치적 태도임을 그들은 알았을까. 사실 개인을 ‘신 앞의 단독자’로 옹립한 데는 근대 자본주의의 논리가 숨어 있었다. 하느님이 베푼 자연이라는 공유지(commons) 안에서 공동체적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이럭저럭 행복하게 살던 이들을 땅에서 떼어내고 상품 생산과 교환의 경제에 끌어들이는 데는 이런 종교관도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러 신학자들은 말한다. 구원은 전혀 개인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며, 우리는 이 세상에서 단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기다릴 뿐이라고.

나는 지난 글에서 강도당한 이를 구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거론하면서 그의 행동을 본받되 더 근본적으로는 ‘강도를 잡아야 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말이 과격한 정치적 발언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라지만, 불의한 세상에서는 상식적인 정의와 진리를 말하는 일마저도 과격하게 들리기 십상이다. 이 세계와 인간의 본질, 영혼과 구원에 대한 이해가 사회의 구조적 차원에 대한 이해를 떠나서 이루어지면 우리에게는 초월적 감성만 남는다. 이 세상의 불의에는 무관심한 개인의 선함만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교회가 제시하는 사회교리에는 정치 아닌 것들이 없다. 인권, 노동, 사회적 약자, 자본주의, 생명과 생태에 대한 교리들은 전부 정치적 해법들을 요구한다. 지하철 시위에 나선 장애인들, 아마존 밀림의 무차별 개간으로 얻은 고기, 낙태와 여성인권 문제를 우리 개인의 내면적 결단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정교분리와 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믿어 의심치 않은 나머지 진리와 정의의 문제도 정치로 치부하고 밀쳐낸 셈이다. 교회가 신앙을 명분으로 정치와 사회에 무관심한 섬이 되어서는 안 되리라. 나는 내 옆의 교우에 대해 확인할 수도 없는 그의 내면을 알고 싶지 않다. 그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는지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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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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