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책을 기획하느라 몇몇 과학자들과 자리를 함께한 일이 있었다. ‘이타성’이란 것을 과학에서는 어떻게 이해하는지 토론하는 자리였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은 개체 또는 집단 차원에서 자기를 보존하고 종을 이어가려는 이기적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데, 남을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이타적 행위는 도대체 ‘과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론에서는 이기적 생명체도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게 장기적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에 그렇게 행동한다고 대체로 설명하는 듯하다. 지능이 매우 낮은 동물들에게서도 이타적 행동이 자주 관찰되는데, 인간 역시 진화론적으로 종을 보전하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이타성을 고무하는 각종 장치를 발전시켜왔다는 것이다. 법이나 사회적 규범과 같은 외적 강제를 넘어 도덕적 신을 발명함으로써 이타성을 내면화해온 것이 인간 진화의 방식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과 생명계의 모든 현상을 진화론으로 환원하는 것이 내심 불편하던 차였는데, 토론 말미에 진화심리학을 전공한 과학자 한 분이 던진 말에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서 신을 믿는다는 게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자기 보존 본능에 역행하는 인간의 이타적 행위마저 진화론으로 설명 가능한데, 굳이 종교나 신의 존재가 왜 필요한가라는 의문이었다.
그러나 진화론 역시 많은 부분을 우연으로 돌리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다. 모든 생명의 출발점인 단백질의 합성과정을 우연으로 설명하는 것부터 그러하다. 인과적 필연성에 기초한 과학적 지식에서 ‘우연’이란 사실상 모르겠다는 말과 같다. 우리가 모르는 그 부분을 하느님의 창조 행위로 믿는 것이 우연보다 못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말씀(Logos) 하나로 모든 생명이 어느 날 뽕! 하고 태어났다고 믿지는 않는다. 창세기의 창조 관점은 이 세계의 시작을 신앙 안에서 설명하려는 장엄한 서사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지금은 무언가가 있다는 모순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예컨대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과학은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존재가 응축되어 시간도 공간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상태를 우리는 상정할 수 없다.
17세기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모든 것의 운동이 기계적 인과율에 따른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선(善)을 향하도록 만든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예정조화설’을 제창했다. 현대의 대표적 무신론자인 리처드 도킨스는 그런 시계 장치를 만든 시계공이 있을 리 없고, 그럼에도 시계가 정확히 돌아간다면 그것은 자연선택이라는 ‘눈먼 시계공’이 맹목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낸 결과일 뿐이라며 지적 설계론을 비판했다. 우리는 이타성과 같은 선한 행위가 하느님의 목적을 향한 것인지 맹목인지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종의 기원」 150주년과 다윈 탄생 200주년 등을 기하여 교황께서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의견을 공표했다. “성경을 읽으면 하느님을 마술 막대기를 든 마법사처럼 상상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다”며 “하느님은 만물을 창조하시면서 각자에게 주신 내적인 규칙에 따라 발전하고 성숙해지도록 만드셨다”고 했다. 지구 나이가 6000년이라는 식의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의 주장을 비판한 것이다. 진화론을 믿는다고 해서 신앙을 포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 세상의 비밀을 탐구할 수 있게 하는 자유의 공간을 주셨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우리는 그 자유를 이용하여 수천, 수만 년 동안 우리 자신의 지혜를 발전시켜 왔다. 이제는 하느님이 주신 우리 삶을 망치지 않는 방향으로 그 지혜를 발전시킬 책임이 주어져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