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과 반대되는 의견으로 유명한 한 심리학자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그리스도교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트윗을 해 화제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은 트위터에 “사회 정의는 우리로 하여금 가난의 원인인 불평등과 일자리, 토지, 주택 부족에 대항해 싸우고, 인권과 노동권을 부정하는 이들과 싸우며, 타인의 존엄을 빼앗는 문화에 대항해 싸우는 것”이라는 내용의 트윗을 날렸다.
이에 캐나다의 심리학자인 조던 피터슨은 “사회 정의와 그리스도교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구원은 한 개인의 영혼과 관계된 문제”라고 응답했다.
사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트윗에 대한 피터슨의 응수에 많은, 아니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들 많은, 아니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틀렸다.
예수 그리스도가 알고 있던 유일한 성경인 유다교 경전을 살펴보면, 탈출기에 하느님과 인류의 관계를 담은 결정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개인의 영혼을 향하지 않고 한 민족을 향하고 있다. 단순한 ‘영적’ 구원이 아니라 사회적 불평등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과 아모리족과 프리즈족과 히위족과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탈출 3,7-9)
이후 하느님과 유다인의 관계에 관한 역사에서도, 아모스와 이사야, 미카와 같은 예언자들은 반복해서 하느님을 대신해 사회 정의를 부르짖는다.
잠언은 “너는 벙어리들을 위하여, 버림받은 모든 이들의 권리를 위하여 입을 열어라. 입을 열어 의로운 재판을 하고 가난한 이와 불쌍한 이의 권리를 지켜 주어라”(잠언 31,8-9)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또 시편 146장 7-9절에서는 “억눌린 이들에게 올바른 일을 하시며 굶주린 이들에게 빵을 주시는 분이시다. 주님께서는 붙잡힌 이들을 풀어 주시고 주님께서는 눈먼 이들의 눈을 열어 주시며 주님께서는 꺾인 이들을 일으켜 세우신다. 주님께서는 의인들을 사랑하시고 주님께서는 이방인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신다. 그러나 악인들의 길은 꺾어 버리신다”면서 하느님을 찬송한다. 여기에는 “구원은 한 개인의 영혼과 관계된 문제”라는 어떤 암시도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이 사회 정의를 세우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6-21)
교회의 성경과 성전(聖傳)에 “구원은 한 개인의 영혼과 관계된 문제”라는 어떤 암시도 없다. 또 사회와 동떨어진 개인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사회라는 거대한 그물의 일부로 살아가고 있다. 이 그물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 하느님의 백성으로 온전한 존엄을 갖고 성장할 수 있도록 지지해줄 수 있다. 반대로 이 그물은 이러한 성장을 막고 왜곡하며 방해할 수도 있다. 교황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다. 개인의 구원은 온전히 이 사회라는 그물에 묶여 있고, 사회 정의는 하느님의 자녀로 지금 그리고 영원히 필수적인 부분이다.
사순 시기는 무엇보다 주님 부활 대축일에 하는 우리의 세례 갱신을 준비하는 때다. 40일간의 기도와 금욕, 자선 활동으로 우리는 복음적인 견지에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고 화해의 성사를 준비한다.
우리는 과연 사회 정의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양심을 성찰하고 있는가. 우리의 개인적인 죄 외에, 인종주의, 편견, 환경에 대한 무관심, 세상의 불의에 동참하는 삶, 폭력, 억압, 환경 파괴 등 사회적 죄에 대해서도 고백하는가. 우리의 형제자매에게 해를 입히는 불의에 대항하지 않고 안주하고 있는가.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선택들이 공동선보다는 이기심에 따른 것인가. 우리가 한 잘못과 하지 못한 일에 대해 회개할 때, 개인적인 죄 이상의 것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있는가.
사순 시기는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서로가 연결돼 있고 서로 책임을 져줘야 한다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전을 확대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윌리엄 그림 신부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로서 일본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일본 주교회의가 발행하는 주간 가톨릭신문 편집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현재는 아시아가톨릭뉴스(UCAN) 발행인으로 여러 매체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