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피해자인 나르시사 칼베리아(92) 할머니는 자국 정부가 금전적 배상 방안을 추진하는 데 대해 “이 나이에 그 돈을 받아 무엇하겠느냐”며 “원하는 것은 배상금이 아니라, 내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준 일본의 사과”라고 말했다고 아시아 가톨릭 통신(UCAN)이 보도했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 최근 우리 정부가 추진하는 제3자 변제에 대해 “굶어 죽어도 그런 돈은 안 받는다”고 말한 것과 같은 취지다.
필리핀 정부의 자체 배상 추진은 유엔 권고에 따른 것이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지난 10일 보고서를 통해 “피해자들은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를 정부가 지지해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구했지만, 정부는 이를 위해 힘쓰지 않았으며, 이는 본질적으로 피해자들에 대한 차별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필리핀 정부는 참전 군인들에 대해 교육과 의료 혜택, 연금 등을 제공하며 보호하는 반면, 위안부 피해에 대해서는 일본과 평화조약 체결 후 배상을 요구할 입장이 아니라는 견해를 고수해왔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피해자인 A 할머니(89)는 UCAN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의 움직임은) 너무 늦었다. 피해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다”고 탄식했다. 12살에 일본군에 끌려간 A 할머니는 “그들이 고문하고 끊임없이 강간했다”며 “한 장교는 목요일마다 찾아와 강간했는데, 그 트라우마 때문에 수십 년 동안 목요일마다 불면의 밤을 보냈다”고 털어놨다.
위안부 피해자의 손녀인 마리벨 카를로스(24)는 “할머니는 일본으로부터 사과와 배상을 받아내기 위해 싸웠지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2년 전 눈을 감았다”고 말했다. 카를로스의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지원 단체 ‘말라야 롤라스’(자유 할머니)를 이끌었다. 이 단체는 정부와 법원을 향해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피해자 지원 단체들은 유엔 보고서가 나온 뒤에야 피해자 권리 회복을 위해 뭔가 하려는 정부 관료들을 비난했다. 그러면서 경제적 능력이 없는 피해자들과 유족들에 대한 정부 차원의 지원을 호소했다. 가톨릭 여성 단체 ‘그리스도를 위한 여성들’은 “교회는 의원들이 하루라도 빨리 피해자 지원법을 제정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피해자 지원 단체들이 말하는 지원은 일본으로부터 받아내야 하는 배상금과는 다른 성격의 경제적 도움이다.퓰리처 센터가 2019년 발간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은 필리핀을 점령한 1942년부터 3년간 1000명이 넘는 소녀들을 끌고 가 성 노예로 삼았다. 이 가운데 생존자(2019년 기준)는 10명밖에 안 된다. 피해자들은 한평생 가족에게조차 배척당한 채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고 퓰리처 센터가 밝혔다. 역사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일제에 짓밟힌 아시아 여성 수를 약 20만 명으로 추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