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사순시기 판공성사 중에 자매님 한 분이 신부들 욕을 했다. 정치하는 신부들이 부끄럽고, 비행기 떨어지라고 한 신부나 길바닥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신부들이 창피해서 성당을 다닐 수가 없다고 했다. 고해성사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지 타인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러면서 이건 성사가 아니다, 똑같은 놈들이라며 고해실 문을 박차고 나갔다. 저도 사제생활 20년 만에 고해 중에 고해소 밖으로 나왔다. 그 자매님은 계속 소란을 피우다가 봉사자에게 끌려 나갔다.”
#사례2. 지난 4월 10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광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신자들이 시국기도회를 열고 ‘친일매국 검찰독재 정권 퇴진과 주권회복’을 외쳤다. 그런데 다음날 가톨릭언론인들의 단톡방은 약간의 소동이 있었다. 현장에 갔던 분이 관련 뉴스와 사진 몇 장, 짤막한 글을 올리자 몇 분이 채팅방에서 나가 버렸다. “전광훈 목사 소식 자주 올리는 단톡방에서는 진작에 탈퇴했다”는 소회에는 불편함이 묻어 있다. 그러자 반론도 뒤따랐다. “우리가 알아야 할 뉴스나 천주교 내의 한 흐름이라고 생각하면 거부감이 덜 할 것 같다.”
위의 두 해프닝은 이달 사순시기와 주님 부활 대축일 직후의 일이다. 먼저 고해성사 사건(?)은 페이스북에 올라온 어느 신부님의 글에서 접했는데 충격적이다. 그 자매는 나름의 사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신자로서 최소한의 도덕과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집회나 시위에서 보일 법한 행동을 성사가 거행되는 고해소에서 서슴없이 자행한 것이다. 그런데 성당 내에 그런 신자들이 늘어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쩌다 가톨릭교회에서 막가파식 행태가 벌어지고 있는지 안타깝다.
두 번째 사례를 보면 같은 신앙인 공동체 안에도 정치적 성향이 갈린다. 침묵하는 다수는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지 않을 뿐이다. 여럿이 모이면 정치와 종교 얘기는 피하란 말이 있다. 그래야 소모적 분란과 갈등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인들의 모임에서 종교 얘기는 예외여서 어쩌다 정치 이슈가 얘깃거리가 된다. 그때마다 보수냐 진보냐 성향에 따라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진다. 한쪽에는 신앙 외적인 이슈로 교회와 공동체에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염려가, 다른 한쪽에는 지행합일과 실천에 대한 강조가 자리한다.
정치적 견해차를 넘어 생각의 폭을 넓혀 보자. 신앙생활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그치고 교회 밖 세상에는 관심을 거둬도 되는 걸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은 ‘지킬 교리’인 사회교리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교리는 다양한 주제, 예컨대 노동자의 권리, 경제적인 공정성, 개인과 국가의 책임, 환경 문제 등을 다루며 적극적인 대처를 주문하고 있다.
나만 믿고 선업을 쌓아 구원받으면 그만일까? 아니다. 복음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다. 이른바 ‘가나안 성도’(‘교회에 안나가’라는 말의 거꾸로 표기)도 일부 있지만…. 교회는 또한 세상 속으로도 시선을 돌려야 한다. 그것이 세상 피조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이다. 복음화의 차원에서도 그렇다. 하느님 사랑 못지 않게 이웃 사랑은 성경 가르침의 핵심 아닌가. 기후위기로 신음하는 공동의 집 지구 지키기도 마찬가지다.
곧 5월 성모성월이다. 신앙인의 모범인 성모님의 덕을 본받도록 노력하고 기도하는 시기다. 같은 신앙 안에서 정치적 견해 차이로 등을 돌리고 다툴 필요는 없다. 개성부터 사고방식까지 같지 않은 우리는 서로의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자. 한때의 소동이나 해프닝도 큰 흐름에서 보면 사소한 것임을 인식했으면 좋겠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며 상대에 대한 배려와 존중, 포용력을 키워 보자.
고계연 베드로
전 가톨릭언론인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