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말씀에는 두 가지 양면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 성경 구절 안에서 예를 들고자 한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카 6,37)라는 말씀과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루카 12,51)라는 말씀이다.
이 두 말씀을 분석하자면 ‘단죄하지 않음’과 ‘용서’로써 한 인격이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중요한 축인 ‘용서’를 실천함으로써 그러한 우리가 주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다. 다음 말씀은 앞서 언급한 ‘주님의 용서’와 상반된다. 주님은 ‘평화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매우 충격적인 발언일 수 있다. 어떤 종교사적으로도 이 말씀은 종교가 세상의 분란과 혼란을 잠재우고 평화를 지향한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교의 근간을 흔드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주님의 이 말씀을 분석해보면 주님의 나라의 상태가 아닌 이 지상의 불화 상태를 주님의 나라의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향점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인간의 인생사에 있어서 이 두 말씀은 매우 상호호응적이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의 품 안에서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 평화를 한껏 누리게 되지만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즉, 세상과 부딪혀가면서 이 세상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세상은 한 인격에 있어서 분명 분열과 위협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그 인격은 세상과 분열하기도 하고 화합하기도 하면서 어딘가로 향해간다.
나는 한때 종교적으로 방황하며 그리스교적 믿음에 미온적일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내 나름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관된 삶이 사회에서는 통하지 않음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다. ‘남을 단죄하지’ 않고 ‘용서’만 하려는 태도는 나를 타인에게 비춰질 때 ‘부족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쉬운’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타협하는 나의 태도는 나의 그러한 생각을 티가 나지 않게 잘해주거나 용서하거나 혹은 생략하거나 하는 방식으로였던 것 같다.
이때 두 번째 말한 성경 구절을 접하면서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려 ‘평화롭게 하려’ 오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주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 주님의 나라의 상태가 아닌 이 불완전한 세상에 불화를 일으키려고 오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내 나름의 삶의 방식에도 균열이 일어났다. 나는 누구나 용서하고 사랑하려 하였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은 선택의 갈림길에 있다. 이 세상을 바꿀 것이냐, 순응할 것이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의 몫이기도 하고 주님의 자녀인 우리가 주님의 나라로 향해가는 즉, 지상에서의 남은 사명을 수행하는 당위적 입장에 행해야 할 우리의 몫이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와 같으면서도 우리와 다른 것을 용서하고 또 우리와 같으면서도 우리와 다른 것에 맞서 이겨내는 것은 같으면서도 매우 다르다. 공통점은 주님의 나라를 만드는 행위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악을 선으로 행하는 행위는 바로 용서이다. 또한 악을 행하는 이들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은 불화를 일으키는 행위다. 하지만 이 불화는 주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한 필수불가결한 갈등으로서 반드시 치러야 할, 즉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이다.
이러한 용서와 불화는 따라서 함께 가야 한다. 주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주님은 우리가 선택하기를 바라신다.
이승혜 프란치스카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