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학교 폭력 피해자의 복수를 다룬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잠을 줄여가며 봤을 만큼 몰입감이 좋았다. 시나리오나 배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이 드라마의 화제성은 그 소재와 소재를 다루는 방식인 것 같다. 피해자의 상처를 다루는 방식은 숙연했고 복수의 통쾌함은 배가 되는 느낌이었다. 스포일러이지만, 결국 피해자는 가해자에 대한 복수에 성공한다.
물론 드라마는 허구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일부 연예인과 운동선수가 한창 인기를 얻고 기량을 발휘하는 와중에, 과거의 학교폭력이 드러나면서 논란이 되기도 한다. 단지 유명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도 과거 학교폭력을 영상 플랫폼을 통해 폭로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최근 목격되고 있는 상황이다. 일반인의 경우 가해자는 피해자의 폭로 이후 자신이 다니던 직장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지기까지 한다. 말 그대로 현실판 ‘더 글로리’로 보는 시선도 있는 듯하다. 같은 맥락에서 사적 복수를 소재로 삼은 드라마나 영화가 흥행하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거리를 남긴다. “당신이 행한 대로 당해보라”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있는 것일까.
정작 드라마가 주려했던 교훈은 단순히 악에 대한 징벌만은 아닌 듯하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과 이러한 일들에 대한 경각심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최근 ‘더 글로리’로 촉발된 여러 담론들이 쏟아지고 있다. 약자를 소외하는 법 정의에 대한 문제 제기, 미디어의 영향력에 대한 성찰, 사적 복수의 위법성, 심지어 복수의 영향을 뇌 과학으로 풀어가기 등이다. 이러한 담론들이 더 활발하게 다루어져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가길 희망한다. 그러나 그런 모든 담론에 앞서서, 피해자들의 아픔이 우선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피해자의 마음을 헤아려 보노라니 한 문장이 떠오른다. “타인은 지옥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 나오는 구절이다. 사르트르는 닫힌 방에서 타인과 함께 지내는 것이야말로 지옥이라고 말한다. 지옥을 뜨거운 불구덩이에서의 영원한 고립으로 상상하는 이들에게는 놀라운 반전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학교폭력의 피해자들에게는 실존적 현실이다.
이 사건들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어린 시절의 철없던 행동이라는 말이 결코 변명이 될 수 없으며 시간은 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피해자의 아픔과 비교할 수는 없겠으나 가해자 또한 그 타인은 지옥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이 교훈이라면 교훈이다. 물론 가해자에게 세상이 지옥이라면, 그것은 타인이 만든 것이 아닌 어제의 자신이 만든 것이다.
철학 이야기를 좀 더 해보려 한다. 사르트르는 개인의 삶에서 주체적 선택을 중요시했다.(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 하지만 그의 실존주의는 구조주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그 유행을 다한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보다 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인의 선택으로 주어진 환경을 넘어서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학교폭력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사회적 안전망을 확충하려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럼에도 개인의 주체성을 중요시하는 사르트르의 주장은 존중하고 싶다. 드라마를 통해 교훈을 얻든 현실을 반면교사로 삼든, 결국 비극의 굴레를 끊어내는 것은 개인의 선택을 통해서이다. 진심어린 사죄와 화해가 그 선택이길 바란다.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