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시골을 오가며 텃밭을 가꿔온 지도 10여 년이 지났습니다. 감자, 옥수수, 고추 등을 심어 놓고 잡초와 씨름하다가 장마철이 올 때쯤 자포자기 상태로 버려두던 어설픈 주말 경작도 몇 해를 거듭하였습니다. 그래도 이제는 야생마를 길들인 듯 제법 밭과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텃밭의 작물을 자라게 하고 화단의 나무에 꽃을 피우는 것이 창조하시고 살리시는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은 몸으로 흙을 만지던 수고에 응답해주신 은총이라 생각합니다. 도시와 공장의 삶에 묻혀 살던 사람에게 마당과 텃밭이 있는 삶이 로망이 되기도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하느님의 그 마음으로 인해 흙과 자연의 생명력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과의 대면이 부담스럽던 시기에 숲과 물이 좋은 곳을 찾다 보니 주변에 잘 가꾼 정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산 깊은 곳에서 숲과 물과 함께 있는 불교 사찰은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었고, 순천만 정원처럼 국가가 관리하는 장대한 수목원도 여러 곳에 있으며, 뜻을 갖고 숲과 정원을 가꾸신 분들이 그것을 일반에 공개한 곳도 여럿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정원을 가꾼 많은 분이 음식점이나 찻집으로 개방하고 있었습니다. 잘 가꾼 정원을 볼 때마다 그것을 보살피는 사람들의 수고가 생각나는 것은 하느님의 마음과 그 마음을 따르는 인간과 자연이 함께 이룬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절두산, 갈매못, 연풍 등 성인들이 박해 속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던 성지도 잔인하고 긴박했던 장소가 말끔한 정원이 되어 순례객을 맞습니다. 성인들의 살과 피, 그리고 정신이 서려 있는 그곳에서 우리는 순교의 정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척박하고 처절했던 고난의 장소가 수목이 우거지고 잘 가꾼 정원이 되어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후손을 맞고 있는 것 자체가 진리를 선택했던 순교자들의 승리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창세기에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은 정원을 꾸미십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창세 2,8) 성경은 이어서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2,9)라고 전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정원지기 하느님이 묵상의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주님은 피조물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시고 가꾸고 돌보십니다. 고대 시절 세상을 통치하든 왕들도 정원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나 봅니다. 바빌로니아의 왕은 온통 황량한 벌판뿐인 곳에 수직으로 켜켜이 놓인 공중정원을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마당에 성모상과 함께 잘 가꾼 정원이 있는 성당은 항상 오고 싶은 곳이 됩니다. 나무와 꽃이 자랄 땅이 없으면 공중정원이라도 연구해 봄 직합니다.
사무실 창틀에 있는 호야에 물을 주며 가끔 혼잣말을 던집니다. 사실 혼자가 아니죠. 인간의 언어는 아니지만, 호야가 나를 느끼고 응답도 합니다. 문득 예수님의 무덤 앞에서 울고 있던 마리아 막달레나에 관한 요한복음이 생각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정원지기’(요한 20,15)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역시 에덴동산을 꾸미신 주님은 부활 후에도 동산을 꾸미시는 정원지기이십니다.
홍태희 (스테파노)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