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로 우리 사회와 관련 국가들이 시끄럽다. 어쩌면 인간이 원자력이라는 에너지를 사용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던 상황이다. 역대 심각했던 원전 사고로 스리마일 섬,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있다. 문제는 이들 원전 사고의 원인이 각기 다르고 이는 곧 원자력이라는 것이 예측과 통제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독일 출신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1944-2015)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 현대를 위험이 사회의 중심적 현상이 되는, 말 그대로 위험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위험은 현대사회 시스템의 실패가 아니라 성공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한다. 가령 자동차라는 발명품은 현대사회의 효율성을 극대화 시켰다. 하지만 충돌 사고, 제반 시설 확보에 따른 재난과 사고, 급발진과 같은 차량결함, 환경오염 등 효율성만큼이나 감당해야할 위험도 증가한다는 것이다. 즉 사회 전반의 성공적인 시스템 구축이 역설적이게도 예측 가능성과 통제 가능성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후 위기를 경험하면서 그의 저서는 다분히 예언자적으로 다가온다.
최근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관련 문제는 이러한 위험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결과물이다. 다음의 질문으로 그 이유를 가늠해본다.
첫째, 인간이 원전과 같은 복잡한 시스템을 완전히 통제 할 수 있는가?
둘째, 지진과 같은 자연재해가 온전히 예측 되고 완전한 대비가 가능한가?
무엇보다 이러한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결정이 공공성 보단 정치이념, 경제성 등과 같은 소수의 이해관계를 더 우선시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원자력을 개발했던 이들이 최고의 과학자이자 전문가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전문지식이 적용된 결과에 대해서는 전문가이자 책임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러하기에 ‘과학’에 대한 신뢰만큼이나 한계에도 주목해야한다. 원자력이라는 분야는 환경, 사회, 경제,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시민의 일상과도 직결된 중요한 문제이다.
“사회적 합리성이 없는 과학적 합리성은 공허하고, 과학적 합리성이 없는 사회적 합리성은 맹목적이다”라는 울리히 벡의 말을 인용해 본다. 오염수 문제뿐만 아니라 원전과 관련된 사항들이 과연 사회적인 합의와 동의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문이다. 같은 뜻을 지닌 시민 단체, 종교 단체 그리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여 더욱 신중한 결정과 방향 모색에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정치인들은 이러한 의견과 목소리에 경청, 논의 그리고 협의를 이끌어가길 바란다. 이념에 기댄 정쟁만으로 이 시간을 보낼 것 같아 염려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교황청을 방문한 일본교회 주교단과 만난 자리에서 핵발전을 구약성경의 바벨탑에 비유해 “인간은 하늘에 닿는 탑을 만들어 스스로 파멸을 부르려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바벨탑은 인간이 전능한 신의 힘을 가지려 했던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대한 비유이다. 그렇기에 핵발전이라는 인류의 강력한 힘(Energy)에 대한 욕망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경고로 받아들인다. 오염수 방류문제는 어쩌면 늦었을 지도 모른다. 뒤늦은 후회가 소용없다는 것도 바벨탑의 교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대로 레오 신부(가톨릭신문 기획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