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없이 성당에 앉아 있다가 가끔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게 되지만, 사람을 피하는 것이 선이 되고 성당에 얼씬거리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는 듯하던 시절이 트라우마처럼 마음에 짙은 상처를 낸 것이 확실합니다. 잠옷 차림으로 텔레비전을 향해 십자성호를 긋고 절을 하던 때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무용담처럼 이야기로 전해지겠지요. 하지만 주요 도로나 병원에 설치돼있던 선별진료소도 이젠 모두 사라졌는데, 아직 성당으로 나오지 못하고 방송 미사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고 있는 분들이 제 주변에도 많이 남아있네요. 하느님과 일대일로 만나면 그만이지 얼굴 마주치기도 싫고 성당 나가기가 귀찮았는데 이참에 쭉 방송 미사 신자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어린 시절 갑자기 주일에 성당 가기가 싫어졌던 나는 배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미사 참여를 건너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식구 모두 성당으로 가고 홀로 남아있던 집의 황량한 느낌은 곧 꾀병에 대한 후회로 이어졌습니다. 다리가 저리고 지루하기만 한 미사 시간은 잠시 피할 수 있었겠지만, 그곳에 모여 있을 친구들 생각에 어린 내 인생의 커다란 한 리듬을 놓친 듯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사실 성당은 친구들이 좋았습니다. 미사나 삼종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려고 서로 그 종에 매달리는 것도 기쁜 놀이였고, 성가 연습, 교리 공부를 하고 개울로 물놀이 가는 재미는 미사의 지루함을 상쇄하고 남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느님은 하늘나라 먼 곳에서 제 잘못을 내려도 보고 상벌을 계산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즐겁기만 한 친구들과의 놀이와 우정 속에서 저를 성장시키시고 기쁨을 주고 계셨음을 깨닫게 됩니다.
팬데믹 시기를 통해서 전에는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이 없던 ‘신령성체’라는 용어를 알게 되었습니다. 미사에 참여할 수 없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믿음으로 성사를 대신하는 사목적 배려이지만, 성지순례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것과 몸으로 찾아가는 성지순례가 같을 수 없듯이 미사 시청과 신령성체를 성사와 혼동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성체성사의 본질은 주님과의 친교라고 배웠습니다. 영성체를 함께하지 못한 미사에서 충만한 기쁨을 얻지 못하듯, 몸으로 느끼는 친교가 빠진 신앙은 ‘팥소 없는 찐빵’과 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람의 보살핌과 함께 흙과 물과 태양이 곡식을 가꾸고, 그 곡식으로 빚은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가 되어 하느님과 세상이 친교를 나누는 자리는 생각할수록 모든 피조물이 진정으로 한몸이 되는 듯합니다. 친교는 사람 사이의 관계를 넘어서 나무와 숲, 물과 강, 하느님의 영이 담겨있는 모든 피조물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까지 확장되어, 우리는 온 우주가 드리는 미사가 되는 신비를 경험합니다.
아직도 주님과 자신만의 고독한 신앙생활에서 나오고 싶지 않아 하는 친구에게 이제는 세상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어떻겠는지 한 번 더 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 자체가 아버지, 아들, 성령의 친교라는 진리를 전해주는 삼위일체 교리는 더더욱 몸과 몸이 부대끼며 서운하기도 하고, 화도 나고, 그러면서도 끝내 하나 되는 기쁨을 주는 신앙생활이어야 한다고 말해 주는 듯합니다.
홍태희 (스테파노)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 대우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