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성가가 가톨릭성가 44번 ‘평화를 주옵소서’일 겁니다. “날 어여삐 여기소서. 참 생명을 주시는 주. 나 주님을 믿사오며 주님께 나아가리. 평화, 평화, 평화를 주옵소서. 그 영원한 참 평화를 우리게 주옵소서.”
아이가 갑작스런 질병으로 병원에 입원하게 돼 주말 내내 상주 간병을 하게 됐습니다. 아이의 고통을 함께 감당해 주지 못한 미안함으로 기도를 하고 싶어도 기도가 되지 않았습니다. 성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의 첫 소절과 어쩌면 그리도 맞아 떨어지는지. “마음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그동안 ‘평화’라는 담론을 생각하면 큰 것만 떠올렸는데 일상의 많은 부분에서 평화가 필요함을 생각했습니다. 마침 병원사목 신부님께서 집전해 주시는 미사에 아이와 함께 참례했습니다. 지친 자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의 크고 작은 고통의 현장에 함께 있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가. 고통받는 현장에서 늘 기억해 주고 마음 모아 주고 격려해 주는 것, 그것이 평화이겠구나.”
우리는 그동안 여러 고통에 제3자적 관전평을 쓰거나 방관자적 시선을 보내는 데 익숙해 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 관심의 시선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봅니다.
2022년 비전향 장기수를 소재로 한 ‘2차 송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습니다. 2004년 한 차례 개봉된 후 18년 만에 같은 제목의 다큐멘터리가 개봉된 것입니다. 90세가 다 된 비전향 장기수들의 북한 송환과 좌절 문제를 다뤘는데 저에게 인상적이었던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건 송환을 반대하던 ‘납북피해’ 가족단체 대표의 인터뷰였습니다. 인터뷰의 대강은 이러했습니다. “우리도 그분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렇게 그냥 송환해 버리면 납북된 분들은 내려오기 힘들어지는 것 아니냐.” 이분들의 생각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었기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난주 제가 속한 성당에는 ‘6·25 정전, 70년이면 충분합니다’라는 제목의 평화를 위한 기도 현수막이 게시됐습니다. 6월 17일부터 7월 27일까지 매일 밤 9시 주모경과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함께하자는 안내가 들어있습니다. 이 기간 함께 기도드려 주어야 할 다양한 분들이 있음을 다시금 기억해 보겠습니다.
박천조 그레고리오(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