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학교를 그만둔지도 3년이 지났다. 30여 년의 교직생활도 지나고 보니 순식간에 지나간 것처럼 느껴졌다. 재직했던 학교는 타 종교를 신봉하는 학교였기에 처음에는 내가 가톨릭신자임을 드러내는 데에 무척이나 어려워했다. 심지어는 부끄러워하기까지 하지 않았나 싶다. 특히 점심 식사 전 기도를 위해 성호를 긋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던 차에 우연한 기회가 찾아와 마치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부르짖던 ‘나는 천주교인이오’라는 말을 힘들지 않게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에 감사를 드린다.
어느 해인가 내가 맡은 반에 중학교 때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아이들이 모두 모였고, 한 달이 지나면서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져, 집에 와서도 마음 편히 있지 못했다. 지켜보던 아내가 ‘성수를 가져가서 뿌려보세요’라고 조언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교실 문에서부터 책상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이들이 바라보는 칠판에 성수를 뿌리며 “오늘 하루도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사랑과 평화, 그리고 지혜의 은총을 허락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조금씩 반 분위기가 바뀌었다. 학년말에 와서는 반 전체가 낙오하는 사람 하나 없이 모두 진급했다.
하지만 호사다마였는지, 평온한 나날을 지나면서 조금씩 생활의 리듬이 깨져가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유혹들에 둘러싸여 나의 신앙생활에도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마 철학자 보에티우스는 ‘악은 그 자체로서 실체가 아니라 선의 결여’(「철학의 위안」 중에서)라고 한 것과 같이 내 주위에는 마치 아수라를 연상케 하는 상황들이 이어지곤 했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신앙심이라고 제대로 자리잡고 성장해갈 수 있겠는가? 이때 흔들리고 있는 나를 붙잡아 주는 대상이 나타났다. 서울대교구 주보 ‘말씀의 이삭’이라는 코너였다. 필진이 펼치는 신앙 간증이 가뭄 속에 단비를 맞는 것과 같이 나에게는 스펀지처럼 훅 빨려 들어와 내가 다시 제자리를 찾도록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아기들의 성장 발달 과정을 보면 다른 동물들과 달리 태어나서부터 걷는 것이 아니라 ‘기고-앉고-서고’를 반복하다가 급기야 걷기를 시작한다. 이 모든 과정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백 번, 수천 번의 넘어짐과 일어남의 반복을 통해 두 다리에 힘을 키워 당당히 걸음을 옮기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신앙인들의 성장 과정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처음부터 신앙의 불꽃이 활활 타올라 신실한 신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여겨진다. 때로는 대부모를 통해서, 때로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신앙적으로 성숙한 단계에 도달하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요즘에 주변을 돌아보면 그 이유야 어떻든지 안타깝게도 신앙을 멀리하거나, 심지어 신앙을 버린 경우를 쉽게 발견하게 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한 어느 시인의 말처럼 흔들리는 신앙 속에서 더욱 단단하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경이로운 일일까?
우리는 모든 사람을 받아 주시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님의 마음을 더 깊이 묵상하며 예수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예수 성심 성월을 보내고 있다. 어린 아기들의 걷기 과정에서 보듯이 우리의 신앙생활도 성패를 반복하더라도 예수님의 성심에 기대어 참신앙을 키워가는 신앙인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희망해본다.
강순조 알로이시오 명예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