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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한담] 주인공 없는 전시장 / 정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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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따라 읽는 복음인 주보 그림이 시작되었다. 신약성경이란 거대한 산맥을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방대한 여정이다.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 예수님과 성모님이, 스페인에는 스페인 예수님과 성모님이 계신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색깔과 형태로 만들어진 성상과 성화를 접할 때 뭉클하게 다가온 감동을 조금이나마 살려보자’, ‘시간을 뛰어넘어 이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들 가슴에 쉽게 다가올 수 있는 모던함도 살리자’라는 생각과 함께 신자들의 두터운 층을 염두에 두고 머리속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사진의 효과를 생각하면 A4 사이즈의 그림이어야 한다. 마티에르를 위해 스톤젤을 바르고 여러번 색감을 올려 밑작업을 마친다. 한 주제를 묵상하고 소품이지만 결코 소품일 수 없는 하늘의 이야기를 정성을 다해 파고든다. 쌓여가는 그림들을 차마 다시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서 화면의 부족한 곳이 눈에 먼저 들어온다. 낮아지고 작아지는 나에게 부끄러움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향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3년 동안 주보 그림에 매달려 지냈던 시간이 끝나고 허영엽(마티아) 신부님의 묵상글과 함께 150여 점의 그림들이 책으로 탄생되었다. 서울 명동성당 갤러리를 시작으로 원주, 전주, 대구, 제주까지 릴레이식으로 순회전을 계획하던 때였다. 작은 세균이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한 세상이 되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가깝게 우리에게 다가온 적은 없었다. 모든 계획이 취소되었다.

텅 빈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게 된 상황. 고립되어 지내는 공포스런 시간이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는 명상의 시간이 됐을지도 모른다. 휘몰아치던 코로나19가 조금 잦아들 즈음 갤러리1898에서 전시가 다시 잡혔다. 사순 시기와 부활이 들어간 일정이다. 신약성경 전체를 묶어놓은 전시장으로 오시는 분께 이러한 인류의 위기에 우리들 가까이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공유하고 싶었다. 코로나19라는 사건을 마주하며 지구가 아파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리의 모든 일상과 머리카락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시는 분 앞에 숨길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지난 시간 우리들의 자만, 분열, 고통, 분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막고 있었으리라.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고자 천지창조의 7일을 감히 시도해 본다. 500호 대작에 200여 명의 인간 군상을 그리는 중 심한 고갈증과 현기증이 난다. 정기적인 당뇨 검사 중 CT촬영에서 예상치 못한 췌장암이 발견되었다. 전시 오프닝과 맞물린 입원날에 병보다 전시 걱정으로 가슴이 타들어간다. 전시장 투시도를 곁에 두고 실제처럼 작품을 배열해 사진을 찍고 머리 속 구상을 영상으로 전달하며 설치를 마쳤다.

‘20년에 걸친 성화 작업의 결실인 전시를 직접 볼 수 없다니!’ 안타까움 속에 전시는 진행되고 병실에 누워있는 나는 믿기지 않는 이 현실과 싸워야 했다. 걱정과는 달리 부활절 예식을 마치신 추기경님과 네 분의 주교님들께서 붉은 수단을 입으신 채로 전시장을 방문해주셨다. 교회의 최고 수장이신 분들께서 부활을 축하하러 전시장에 오시다니, 전시장은 그 자체로도 그득하다. 나는 마음 속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아! 진정한 주인공은 주님이셨군요!’
정미연 아기예수의데레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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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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