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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평화칼럼] 정치적 사랑

조민아 마리아(미국 조지타운대 신학 및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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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종의 회칙 「모든 형제들」에는 “정치적 사랑”이란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사랑’은 그리스어로는 ‘아가페’, 라틴어로는 ‘카리타스’로, 어떤 특정한 행위나 감정이라기보다 우리의 삶과 지향이 사랑으로 변화하여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코린토 1서 13장에 나오는 그 사랑이며, 또 “하느님은 사랑”이라 할 때의 그 사랑이다.(1요한 4,8)

그리스도께서 삶과 죽음을 통해 가르치신 이 사랑은, 신자유주의 사회가 부추기는 ‘욕망’과 대척점에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사회는 욕망을 추동하는 “할 수 있다”의 조동사로 운영되는 사회다. 무엇이든 가능하다. 하지만, 실은 다른 이들의 욕망을 거울삼아 끝없이 스스로를 소진시키는 노예의 삶을 살게 한다.

이와 달리, 사랑은 성취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에게 주도권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기에 사랑은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게 익숙한 질서, 내 능력과 의지를 지탱하던 세계를 위반하고 내게 낯선 세상에 참여하며, 내가 아닌 다른 존재로 나아가는 초월로 이끈다.

교종이 “우리는 사랑을 위하여 만들어졌고, 우리 모두에게는 ‘자기 자신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 안에서 존재의 성장을 찾는 일종의 ‘탈아’(脫我, ekstasis)의 법칙이 있습니다’”(「모든 형제들」 88항)라고 강조한 내용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정치적 사랑”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겉보기에는 깊은 관계처럼 보이는 자기중심적 친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89항) “친밀하고 가까운 관계에서뿐 아니라, 사회, 경제, 정치 차원의 거시적 관계에서도” 드러나는 사랑이다.(181항) 그리스도인에게 정치적 사랑의 핵심은 언제나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사랑”이다.(187항)

우리 사회 ‘주류’의 경계 밖에서 살고 있는 타자들, 소외된 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정치적 활동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그들을 단순히 시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며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존엄을 깨닫고, 그들 속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며, 그들을 사랑함으로 나의 삶이 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지향해야 할 정치적 사랑이다. 소외된 이들의 삶을 억누르는 폭력들, “기본 인권을 침해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 급선무”(187항)가 되어야 하는 까닭은 그 폭력들이 사랑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획득하기 위해 상대편의 약점만을 부각시키고 의견이 다른 이들을 비난하고 악마화한다. 내 편을 결속시켜 힘을 키우는 이런 “마피아 정치”는 “그릇된 공동체 정신으로, 풀려나기 어려운 의존과 종속의 유대 관계”를 만든다.(28항) 이런 정치판에서는 교종이 강조한 “정치적 사랑”을 찾을 수 없다. 남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다고, 내가 해야만 한다고 고성방가를 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소외된 이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야심이 있을 뿐, 그들의 존엄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랑이 없다.

2014년 방한 때 세월호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달았던 교종은 “인간의 고통 앞에서는 중립을 지킬 수 없다”고 말했다. 내 생각에는 이 말이 어느 정당을 지지할 것이냐, 어느 편에 설 것이냐는 말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그리스도인의 정치적 선택은 폭력을 당하고 길바닥에 내쳐진 이들을 모른 척 지나쳐 반대편 길로 건너갈 것인가, 다가가 손을 내밀고 어깨를 일으켜 이웃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지, 어느 정치인을 편들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당파성은 소외된 자들을 위한 당파성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위험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92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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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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