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자니아·남수단·말레이시아 등 비유럽 국가에서 등용… 교황청 주교부 역할, 신앙교리부보다 강화
신임 추기경이 2020년 11월 바티칸 성 베드로대성전에서 비레타(biretta, 추기경을 상징하는 붉은색 각모)를 무릎에 올려 놓고 서임식을 기다리고 있다. OSV
프란치스코 교황이 9일 발표한 신임 추기경 21명 명단을 보면 교황의 교회 통치 방향과 개혁 의지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교황은 이번에도 중심보다는 변방을 더 중시하는 ‘프란치스코식 인사’를 단행했다. 이번에 추기경이 탄생한 폴란드 우치대교구ㆍ탄자니아 타보라대교구ㆍ남수단 주바대교구ㆍ말레이시아 페낭교구 등은 비교적 변방에 속한다. 추기경 임명이 확실시됐던 신임 브뤼셀-메헬렌대교구장(벨기에)과 마드리드대교구장(스페인) 중에서도 교황은 예상과 달리 마드리드대교구장만을 추기경으로 발탁했다. 유럽연합(EU) 본부가 있는 브뤼셀은 사실상 EU의 수도다. 브뤼셀에 비하면 마드리드는 변두리다.
교황은 전통적으로 추기경이 교구장으로 있는 유럽의 대표적 교구에 새 추기경을 임명하지 않고 있다. 지난해 임명한 파리대교구장조차 대주교 신분이다. 현재 이탈리아 밀라노와 베네치아, 미국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치스코에도 추기경이 없다. 그럼에도 교황은 지난해 몽골ㆍ파라과이ㆍ싱가포르ㆍ동티모르에 추기경을 임명했다.
교황은 추기경단의 지역적 균형을 고려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추기경이라고 하면 ‘서구 교회의 학식 높은 백인 성직자’ 이미지가 강했다. 지역적 대표성을 띨 수 있는 성직자들로 추기경단을 구성하려는 게 교황의 의지다. 이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 ‘역차별’이라는 불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주교단 재편과 외교력 강화
이번 인사의 또 다른 키워드는 주교단 재편과 외교력 강화다.
주교 임명과 주교단 운영 등 주교에 관한 업무를 총괄하는 교황청 주교부 장관 로버트 프레보스트(아우구스티노회) 대주교가 이번에 추기경으로 임명됐다. 주교부 장관이 수도회 출신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외교관 임기가 거의 끝나가는 주이탈리아·산 마리노 교황대사 에밀 폴 체릭 대주교와 주미 교황대사 크리스토프 피에르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것도 주목할만하다. 교황대사는 부임지 국가에서 교황청을 대표할 뿐만 아니라 지역 교회 주교 선발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두 추기경은 당분간 교황이 새 주교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균형감 있는 조언을 할 것으로 보인다.
교황청 동방교회부 장관 클라우디오 구제로티 대주교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주교를 지낸 구제로티 대주교는 슬라브 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높다. 향후 우크라이나-러시아의 평화 회복 과정에서 다리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또 ‘중국통’으로 불리는 홍콩교구장 스테판 차우 사우얀 주교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데서 베이징 정부와 대화를 계속해 나가려는 교황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차우 사우얀 주교는 지난 4월 베이징교구장 리 샨 대주교 초청으로 본토 교회를 공식 방문했다. 그는 방문 후 “중국 신자들도 교황과 시진핑 국가 주석의 만남을 희망한다”고 전했다. 그는 바티칸과 중국의 외교 정상화를 위해 더 책임감 있게 움직일 것으로 기대된다.
목자들의 역할 강화
교황청 부서장 가운데 주교부ㆍ동방교회부ㆍ신앙교리부 장관 3명이 추기경이 됐다. 그런데 새 추기경 명단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명단 순서는 부서 직무의 중요도로 결정되는 서임 순서다. 주교부 장관이 명단 맨 위에 올라 있다. 동방교회부 장관은 두 번째, 신앙교리부 장관은 세 번째다. 과거에 신앙교리부 장관은 ‘교황청 2인자’라고 불리는 국무원 총리 뒤였다. 신앙의 수호자 역할은 줄이고 목자의 역할을 늘려나가는 교황청 구조 개편의 흐름이 감지된다.
이번 인사로 추기경단에 대한 교황의 영향력은 더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만일 내일 당장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가 열린다면 선거권이 있는 80세 이하 추기경 119명이 참석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은 9명,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임명한 추기경은 31명이다. 나머지 79명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임명했다. 오는 9월 30일 서임식 뒤 21명 가운데 80세 이하 18명이 합류하면 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차기 교황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교회 통치 방식과 개혁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다는 의미다.
김원철 기자 wckim@cpbc.co.kr
■ 새 추기경 명단(9월 30일 서임 예정)
1. 교황청 주교부 장관 로버트 프란시스 프레보스트 대주교(아우구스티노회)
2. 교황청 동방교회부 장관 클라우디오 구제로티 대주교
3. 교황청 신앙교리부 장관 빅토르 마누엘 페르난데스 대주교
4. 주이탈리아·산 마리노 교황대사 에밀 폴 체릭 대주교
5. 주미 교황대사 크리스토프 루이 이브 조르주 피에르 대주교
6. 예루살렘 라틴 총대주교좌 피에르바티스타 피자발라 대주교
7.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대교구장 스티븐 브리슬린 대주교
8. 스페인 코르도바대교구장 앙헬 식스토 로시 대주교(예수회)
9. 콜롬비아 보고타대교구장 루이스 호세 루에다 아파리치오 대주교
10. 폴란드 우치대교구장 그제고시 리시 대주교
11. 남수단 주바대교구장 스테판 아메유 마틴 물라 대주교
12. 스페인 마드리드대교구장 호세 코보 카노 대주교
13. 탄자니아 타보라대교구 부교구장 프로타제 루감브와 대주교
14. 말레이시아 페낭교구장 세바스티안 프랜시스 주교
15. 홍콩교구장 초우사오얀 스테파노 주교(예수회)
16. 프랑스 코르시카섬 아작시오교구장 프랑수아 자비에 뷔스티요 주교(작은형제회)
17. 포르투갈 리스본교구 보좌주교 아메리쿠 마누에우 아우비스 아귀아르 주교
18. 살레시오회 총장 앙헬 페르난데스 아르티메 신부
19. 교황대사를 역임한 아고스티노 마르케토 대주교
20. 베네수엘라 전임 쿠마나대교구장 디에고 라파엘 파드론 산체스 대주교
2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폼페이 성모성지 고해사제 루이스 파스칼 드리 신부(작은형제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