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세히 보지도 않고 그런 말을 하는 걸까요?”
한 스테인드글라스 공방을 취재하면서 신자에게 들었던 말이다.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운지 얼마 안 됐다는 이 신자는 한 본당 신자와 가벼운 언쟁을 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신자와 언쟁을 한 상대방은 ‘성당이 다른 성당에 비해 너무 평범하다’고 푸념했다고 한다. 평소였으면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이야기였지만, 스테인드글라스를 배우면서 성당 창문에 담긴 ‘빛의 예술’에 감탄하던 그에게는 마냥 넘길 수 없는 이야기였다고 한다. 상대방도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성당에 설치된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다움을 알았다는, 나름 ‘행복한 결말’이었다.
우연이었을까. 그의 이야기를 듣기 전 비슷한 말을 한 심포지엄에서 들었다. 심포지엄의 한 참석자는 자신의 아이가 조현병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조현병. 불현듯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사진 속 그의 자녀는 성인이 돼 평범한 직장에 들어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웃고 있었다. 부모의 노력과 꾸준한 치료 덕분이었다. 그는 예전을 떠올리며 “아이의 평범한 모습을 세상이 보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원망스러웠다”고 전했다. 그는 또 “세상에 아이의 평범함을 증명한 지금이 자랑스럽다”는 말도 덧붙였다.
두 이야기는 모두 편견에서 비롯됐다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그 ‘편견’도 부분적으로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문제는 그 편견을 온전한 진실이라 판단할 때다. 사회적 참사의 희생자들이 편견과 무관심에서 오는 고통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반대로 판단하기보다 이 또한 하나의 사실이라고만 이해하려 했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두 화자가 마주했던 다툼과 서러움은 없었거나 줄어들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