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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한담] 내려놓음, 다시 일어서다 / 정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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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밤, 깊고도 긴 나날들을 보냈다. 나는 12번의 항암을 하며 가족의 사랑을 먹으며 힘든 시기를 이겨냈다. 바쁘다는 핑계로 손주들과 자식들에게서 도망치듯 살아온 지난 시간이다. 병마 앞에 서고 보니 힘없는 나에게 가족의 사랑만이 버팀목이 된다. 음식을 담당하는 딸, 운동 스케줄을 짜는 사위, 애타게 매일매일 소식을 묻는 남편, 엔도르핀 그 자체인 4살짜리 손녀 앞에 나는 점점 3살 먹은 아이가 되어간다.

두 차례의 항암이 끝날 즈음 베개 위에 숭숭 빠진 머리카락이 보인다. 언젠가 머리를 밀고 가벼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다.

‘그래! 계획한 일은 아니지만 시원하게 스스로 머리를 밀자!’

그런데 까까머리를 한 나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다. 신기하게도 헤어스타일 하나에 모든 게 원색에서 무채색으로 바뀌는 이 변이는 내면으로만 깊숙이 바라보라는 주님의 예시일까? 그렇게 짊어진 짐들을 내려놓고 홀로 주님 앞에 선다.

갚아야 할 마음의 빚, 인간 관계, 그동안 쌓아둔 많은 물건, 주님 사랑에 응답하지 못한 숨겨놓은 양심, 내가 가고 나면 하찮기만 한 정리해야 할 그림들.

주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이름을 앞세운 건 아닐까? 언제나 시선은 나를 향하고 진실로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였는지, 일흔 번을 용서하였는지, 신약성경을 그리면서 믿음으로 일어나는 수많은 기적의 사건들이 그림 속에서만 일어나고 나에게 일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일까? 벼랑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쓴 것 뒤의 달콤함은 더 향기롭다.

죽어가는 생명에게는 그토록 소망하던 이 순간이 선물처럼 다가온 오늘,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의 터널 안에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가 있음을 깨닫는다. 링거에서 떨어지는 한 방울 한 방울을 연옥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기도의 방울로 바치니 힘든 시간은 어느덧 지나간다.

보잘것없는 나를 끝까지 사랑하고 기다려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간직해야 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단지 머리로만 행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지 않으면 상실한다. 잊으면 잃는다. 내 가슴에 인장처럼 새겨 현존하시는 주님 사랑에 보답하려 한다. 그렇다. 이제 나는 숨 쉬고 있음에, 아픔도 느낄 수 있음에, 귀여운 손녀의 어여쁜 손가락을 만질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가족, 친구, 은인, 형제자매, 무엇보다 애처롭게 나를 바라보고 계신 주님의 눈길에 복받치는 울음으로 감사를 드린다.

일어선다!
작은 어떠한 것도 예전과는 달리 보이는 세상에 감사와 기쁨의 눈물로 마주하며 다시 일어선다.
아침에 눈뜰 때마다 이 하루의 기적을 감사드리며 제 삶의 방패가 되어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사도 바오로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19-20) 하신 말씀을 꽉 붙잡는다.
정미연 아기예수의데레사(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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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2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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