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이며 주인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요한 13, 1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렸습니다. 스승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를 갖추신 분이었습니다. 또한 스승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많은 비유로써 가르쳤습니다.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가 모범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모습을 따라 우리도 서로 발을 씻어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스승이신 예수님이 지금 대한민국의 교사로 오시면 어떤 말을 들을까요? 혹시 발을 보여주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모욕감을 주었다고 아동학대죄로 고발당하시지는 않을까요.
지난달 18일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생을 마감했습니다. 전국의 선생님들은 깊은 슬픔 속에서 추모와 분노에 빠졌습니다. 그 이후 믿을 수 없는 교권 침해 경험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교권침해가 알려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특수학급 또는 기간제 선생님들은 상대적으로 더 큰 갑질을 당한 것으로 들어났습니다. 억눌린 것이 한 번에 터지듯 결국 선생님들은 교실을 나와 서울 한복판 폭염 속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교육부장관과 교육감을 비롯한 교육계의 사람들은 놀란 듯이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쏟아냈습니다. 정부, 여당은 학생인권조례를 겨냥했습니다. 대통령실은 ‘과거 종북주사파가 추진했던 대한민국 붕괴 시나리오의 일환’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학생의 인권이 너무나 강조되었기에 교사의 교권이 추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과거처럼 때리면서 가르치자고 합니다. 마치 이번 사건을 학생과 교사의 대결로 보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체벌과 촌지가 난무했던 야만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학생 인권과 교사의 교권은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의 인권을 빼앗아 자신의 교권을 지키자는 선생님은 한 분도 없을 것입니다.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가 교권이 아닙니다. 교사가 아무 간섭 없이 가르칠 수 있는 권리가 교권입니다. 선생님들이 교실을 나와 거리에서 외친 것은 학생들을 때릴 권리를 보장하라가 아니라 교사의 가르칠 권리를 보장하라 입니다.
더 근본적으로는 우리 교육의 비정상이 있습니다. 지금 학교는 학생을 바른 양심을 가진 윤리적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의 장이 아닙니다. 우리 교육은 일명 스카이대학을 정점으로 하는 입시교육만이 있을 뿐입니다.
대통령은 수능에서 킬러문항을 없애는 것이 교육의 해결책처럼 말했습니다. 또한 교육카르텔을 부수겠다고 ‘건폭’에 이어 학원 선생님들을 악의 무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킬러문항이 사라져도 각자도생의 경쟁교육이 바꾸지 않은 한 지금 우리 학교의 모습은 언제나 그대로 일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 기계가 되어버린 아이들, 내 아이만을 위해 갑질하는 학부모, 그 갑질에 고통 받는 선생님. 모두가 이 시대 교육의 희생자들입니다. 현 교육 시스템에 참여하는 학생, 교사, 학부모 모두가 우리 교육이 만들어낸 희생자들입니다. 유치원부터 시작하는 의대입시와 대학 서열화, 시험만 잘 보면 최고라는 능력주의, 그 속에서 무너진 공교육과 커질 대로 커져버린 사교육은 모두 경쟁교육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사제의 눈> 제목은 <배운다는 건, 가르친 다는 건>입니다. 교권회복을 넘어 학교가 경쟁의 경기장이 아닌 존경과 우정을 통해 사람을 길러내는 참된 장소이길 바라며 오늘도 평화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