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커] 한국교회의 첫 번째 사제 성 김대건 신부.
두 번째 사제는 가경자 최양업 신부인데요.
그 뒤를 이어 한날한시에 사제품을 받은 3명의 신부가 있습니다.
그들은 누구이고,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윤재선 기자가 살폈습니다.
[기자] 1886년 말레이반도 페낭신학교의 조선인 신학생들 모습입니다.
페낭신학교는 파리외방선교회가 세운 국제신학교.
당시 조선교회는 1873년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신학생 22명을 선발해 그곳에 파견했습니다.
그 첫 결실이 맺어진 건 1896년 4월 26일.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에서 거행된 사제서품식이었습니다.
한국 땅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사제서품식 대상자는 강도영 마르코, 정규하 아우구스티노. 강성삼 라우렌시오,
이들은 한날한시에 사제품을 받았지만 나이 순에 따라 강도영(1863~1928) 신부가 세 번째, 정규하(1863~1943) 신부가 네 번째, 강성삼(1866~1903) 신부가 다섯 번째 사제로 이름을 올립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이 세 분은 바로 국내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는 것, 그게 가장 특별한 의미가 있겠죠. 비로소 이 땅에 사제서품식이 열리고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한 곳이 바로 우리나라였다는 거죠."
페낭신학교에서 사제양성 교육을 위한 여정은 험난했습니다.
언어와 풍습, 기후와 음식이 다른 땅에서 풍토병에 시달리는 등 갖은 고생을 다한 것.
이런 이유로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주교(1844년~1890년)는 서울 용산 원효로 일대에 땅을 구입하고 예수성심신학교를 세웁니다.
1890년 페낭에서 귀국한 이들 세 명의 신학생은 마지막 사제양성 과정을 국내에서 마치게 됩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1892년 용산 신학교에서 마지막 과정을 했다는 거죠. 국내에서 사제를, 사제 양성을 위한 마지막 교육이 국내에 있었다는 것이 특별하고요."
강도영 신부의 첫 사목지는 미리내본당.
1896년 5월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후 미리내에서만 34년 간 사목하면서 김대건 신부와 페레올 주교 묘소를 단장하고 그 옆에 기념 경당을 건립했습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자 비신자를 가리지 않고 양잠과 농업기술을 가르쳐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습니다.
강 신부는 1929년 3월 12일 선종 후, 김대건 신부 옆에 묻혔습니다.
정규하 신부는 한국인 사제로는 처음으로 원주교구 풍수원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습니다.
이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07년 우리나라 네 번째 성당인 풍수원성당을 건립합니다.
엄혹했던 일제 시기, 의병들과 본당 신자들을 모아 삼위학당(三位學堂)을 설립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가 하면 한글과 수학 등 신학문과 천주교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열정을 다했습니다.
특히 1920년부터 매년 6월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에 거행하기 시작한 '성체거동' 행사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47년 간 풍수원본당 사목에 애썼던 정규하 신부는 81세로 선종한 후 성당 뒷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습니다.
강성삼 신부는 사제품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부산 절영도에 부임해 사목활동을 시작합니다.
이후 사제로 살았던 7년 4개월 중 6년을 마산교구 수산본당의 명례공소에서 지내며 사목에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페낭신학교 시절 얻은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1903년 9월, 37살의 젊은 나이로 선종합니다.
<조한건 신부 / 한국 교회사연구소 소장>
"마치 우리 프랑스의 아르스의 성자라고 요안 마리아 비안네 성인이 본당 신부님의 수호 성인인 것처럼 이 세 분이 한국 교회, 이 땅에서 탄생한 사제로서 어떻게 보면 한국 교회 본당 신부의 어떤 모습들, 그런 것의 모범을 보여주셨고…"
한국 땅에서 배출된 첫 사제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헌신과 사목적 열정을 본받는 건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의 몫일 겁니다.
CPBC 윤재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