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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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 부르심

이소영 베로니카(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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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원로 신부님께 어떻게 그 길을 걷게 되었는지 들은 적 있다. 소신학교 재학 시절 윗 학년 선배들이 교수 신부의 숙소로 숨어들어 먹을 것과 술을 훔치다 퇴학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 사건을 계기로 성소를 처음 느꼈다고 했다. “좀 뜬금없죠?”라며 말씀을 이어갔다. 소신학교 입학원서를 제출하러 간 큰형이 뭐하러 신부 되려 하냐며 접수하지 않고 돌아온 통에 신부님은 동년배보다 일 년 늦게 입학하셨단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한 학년 위였어야 했다. 나서기 좋아하고 분위기에 껌뻑 죽던 당시 성격상, 만일 해당 학년에 속했더라면 자신도 분명히 거기 가담했을 거라 하셨다. 앞장서서 훔쳐먹었을 게 틀림없다고. 그때 생각하셨단다. ‘이래서 한 해 늦게 입학하게 하셨구나. 신학교 잘리지 말라고. 이 길로 부르신 게 맞나 보다.’

“전 식탐도 많아서 걸리기 직전까지 꺼내먹었을 거라니까요.” 강론 듣던 당시엔 웃었지만 지금 떠올리면 뭉클하다. 그 나잇대에 동년배보다 한 학년 아래인 것은 상처였을 수 있는데 거기서 부르심을 읽다니. 정확히 알진 못해도 그분은 40년 가까이 사제로 살아왔을 테다. 젊음을 내놓고 따랐던 길의 회고는, 그렇지만 비장하지 않았다. 깃털처럼 가볍고 명랑만화처럼 유쾌했다. 이는 곧장 알아듣고 따라나선 영혼만 품을 익살스러움일 것이다.

몇 해 전엔 부산의 한 수녀원에서 성탄 시기를 지내며 어느 원로 수녀님의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입회할 당시엔 막연히 고아와 고통받는 아이들을 돌보고 싶단 마음이었을 뿐 부르심을 깊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하셨다. 그렇게 첫 서원을 마치고 발령받은 보육 기관에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듬뿍 쏟으며 헌신하셨단다. 두 해 흘러 소임 이동한 수녀님은 첫정을 준 아이들이 아른거려 견디기 어려웠단다. 앞으로도 2~3년 주기로 헤어짐을 겪을 생각에 막막하셨다는 거다. 주위에선 그러니 너무 마음을 주지 말라 조언했지만, 적당히 사랑하는 건 성격상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옳지 못한 것 같더란다.

그래서 기도하셨다고 했다. “이래 갖곤 마음 아파서 수도생활 몬 하겠심더. 다들 내 보고 사랑을 덜 주라 카는데 그건 당신 가르침과 다른 거 아임니꺼. 내 쫌 안 아프거러 어이 해보이소.” 매일 기도했음에도 두 해 지나 가차 없이 다음 소임지로 발령이 났다. 그런데 이번엔 거짓말처럼 고통스럽지 않았단다. 신은 내가 이 길을 계속 걷길 원하는구나, 그때 느끼셨단다. 수도자는 애착을 갖지 말아야 하니, 만일 바라던 대로 소임 이동을 면했더라도 그건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러니 한 차례 슬쩍 손 써주는 대신 자신에게서 아파하는 마음을 통째로 떼어가셨다는 거다. 사실 누구나 첫정은 각별하기 마련이며, 두 번째 발령 후 수녀님 마음이 괜찮았던 것은 앞선 고통이 만들어낸 자기보호 기제 때문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분은 이를 두고 ‘아파하는 마음을 주님이 가져가 주셔서’라 하셨다. 순정한 믿음. 그 아름다움에 관해 생각했다.

수도자는 세 덕목을 서약한다고 들었다. 정결, 가난, 순명.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 문제는 순명이었다. 호불호를 지우고 도화지처럼 하얗게 되는 것이나 무거운 관념을 버리고 티끌처럼 가벼워지는 것엔 도저히 자신 없었다. 손재주 없고 재깍재깍 청소 안 하는 등의 결점은 노력하여 개선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고집스레 이마를 치켜든 자아는 어쩌지 못했을 테다. 공부하고 가르치는 길을 걸어오며 단 한 번 마음을 두었던 다른 길. 그 길로 끝내 부르시지 않은 데엔 이유가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이 복잡한 내면과 날 선 관점과 고집스러운 선호 또한 신이 내어주신 것일 테다. 다른 누구 것이 아닌 나의 것. 그걸로 세상에서 좋은 쓸모를 갖고, 사랑하며 살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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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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