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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단상]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호원숙 비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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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견딜 것 같은 더위가 한풀 꺾이었다고 하지만 여름의 긴장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여기저기 백합이 올라오더니 순결하고 그윽한 향기를 뿜으며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백합 종류도 여러 가지인지라 독할 정도로 향기가 나는 종류도 있지만, 우리 마당에 올라오는 백합은 향기가 날 듯 말 듯 수줍은 사람 같습니다. 큰 나무 밑에서 자꾸자꾸 퍼져나간 꽈리가 열려 주황색으로 작은 불꽃처럼 물들어갑니다. 가을의 서곡처럼, 뽀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귀여운 식물입니다. 심심했던 옛날 아이들의 놀잇감이었죠.

오랜만에 온 어린 손주의 손을 잡고 산에 올랐습니다. 아이에게는 처음 올라가는 산이었는데, 제법 잘 걸으면서 서로 기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할머니는 아가에게 ‘달겨드는 날벌레들을 어쩔 수 없어, 모기는 무섭지 않아 물리칠 수 있어’ 노래를 만들어 부르며 걸었습니다.

잠자리채와 곤충채집통을 들고 아이와 함께 내려오는 젊은 아빠를 만납니다. 요즘도 이런 모습이 있구나 하며 참 기특하게 바라봅니다. 풍뎅이밖에 못 잡았다며 보여줍니다. 아마도 그 아이는 커서도 아빠와 숲에 곤충채집을 다니던 시간을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손주와 꽤 오래 걷다가 돌아오니 목 뒤에 벌겋게 물려 부어있더군요. 그래도 싫다 하지 않고 할머니와 산책을 하고 온 아이의 목에 약을 발라주며 호호 입김을 불며 장하다고 칭찬해 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사랑의 표시입니다.

동대문시장에서 주문해 온 소창을 잘라 손바느질을 하여 수건을 만듭니다. 제가 이 여름을 견디어 낼 수 있었던 아주 작지만 소중한 일이었습니다. 바느질을 할 때마다, 수실로 수를 놓을 때마다 저절로 마음이 가라앉고 기도가 됩니다. 인류의 오래된 일이어서일까요? 욕심도 조바심도 불안감도 사라집니다. 아가들이 태어나면 턱받이로 쓰라고 줍니다. 구안와사가 와서 만나기를 꺼리며 외출을 하지 못하는 지인에게 위로의 뜻으로 보내줍니다. 가족의 간병으로 지친 분을 위해 기도하듯이 꿰맨 가제 수건을 보내줍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사랑과 기도의 표시입니다.

얼마 전 광복절 특집 방송으로 하와이로 이민 간 조선인들이 독립운동을 도운 기록을 다큐멘터리로 보여줍니다. 사탕수수농장에서 노예처럼 일하면서 번 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후원금으로 보냈던 명부를 보여줍니다. 그들의 자손들이 증언하는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습니다. 특히나 남자와는 따로 여자의 이름으로도 후원금을 보내는 당당함에 머리가 숙여집니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을 견디어 낸 것은 서로 마음을 모아 희망을 갖고 자존심을 지킨 것이었겠지요. 저는 그들을 기억하며 마태오 복음의 말씀을 뇌어 봅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마태 18,19)



호원숙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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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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