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중 유다인들을 숨겨주다 발각돼 나치 독일에 의해 살해된 유제프ㆍ위크토리아 울마 부부와 자녀 7명 등 울마(Ulma) 일가족 9명이 이날 동시에 복자로 선포된다. 자녀 중에는 엄마 뱃속에서 9개월을 보내고 막 세상으로 나오려던 태아도 있다. 교회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까지 시복 대상에 포함시킨 유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목숨 걸고 유다인 숨겨줘
가장인 유제프 울마는 마을에서 인정받는 농부이자 가톨릭 청년단체 활동가였다. 1942년 나치에 쫓기던 유다인 8명이 찾아와 보호를 요청하기 전까지 울마 가족은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유제프는 그들의 애원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는 민족과 종교를 떠나 모두 똑같은 하느님 자녀인데, 단지 유다인이라는 이유로 끌고 가 학살하는 나치의 광기에 치를 떨던 의인이었다. 당시 독일군 점령지에서 유다인을 보호하다 발각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유제프는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들을 1년 반 넘게 농장 다락방에 숨겨줬다. 집이 마을 외곽에 있어 장기간 은닉이 가능했다.
하지만 1944년 3월 24일 한 부역자의 밀고로 들통이 났다. 독일군과 비밀경찰은 그날 농장에 들이닥쳐 유다인 8명과 울마 가족 9명을 밖으로 끌어내 즉결 처형했다. 가장 어린아이는 젖먹이였다. 총살당한 유다인 중에 3살짜리 소녀도 있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그날 독일 경찰 간부는 마을 남성 서너 명에게 마차를 끌고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간부는 농장으로 향하면서 마부들에게 “유다인을 돕는 ‘폴란드 돼지들’은 어떻게 도살되는지 보여주겠다”고 소리쳤다. “총소리와 비명, 절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쓰러진 위크토리아 부인의 다리 사이에서 신생아의 머리를 봤다”는 등의 증언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울마 가족은 한동안 지역 사회에서 영웅은커녕 비극적으로 몰살당한 가족으로만 기억됐다. 이후 시간이 흐르면서 울마 부부의 영웅적 덕행에 대한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부부는 숨죽이면서 유다인들을 숨겨주고 먹여 살렸다”고 말했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인 국립추모연구소 마테우스 슈피트마 부소장이 오랜 세월 울마 가족에 대한 자료를 수집했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OSV와의 인터뷰에서 “부부는 자신들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유다인들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며 “그들의 신앙이 그런 위험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영감을 줬다”고 말했다.
유다인 돕다 희생된 폴란드인 상징
지역 사회에서 시복 얘기가 나온 것은 2000년 이후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2003년 본당 신부로부터 시복 준비 얘기를 듣는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놀랐다”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교구와 본당, 지역 주민들과 함께 울마 가족을 추모하는 기념비를 세우고 출판물을 발간했다. 2016년 추모박물관 개관식에는 안제이 두다 대통령까지 참석해 관심을 보였다. 교황청은 시복심사 과정에서 울마 가족의 목숨을 건 이웃 사랑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슈피트마 부소장은 울마 부부가 전쟁 중에 많은 자녀를 낳아 기른 점에도 주목했다. 그는 “그 집에는 늘 웃는 아이들과 그들을 매일 먹이고, 씻기고, 옷 갈아 입혀 키우는 부모가 있었다”며 “그때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좋았던 시기가 아니라 최악의 독일 점령기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오늘날 출산과 양육이 자신들 경력에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는 부부들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울마 가족의 희생은 사실 폴란드보다 이스라엘이 먼저 기렸다. 이스라엘은 이미 1995년 울마 가족에게 ‘열방의 의인(Righteous Among Nations)’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나치의 유다인 대학살(홀로코스트) 기간에 목숨을 걸고 유다인을 구한 비유다인에게 부여하는 칭호다.
연구 자료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중에 폴란드인 30만 명 이상이 사형 위험을 무릅쓰고 유다인들을 보호했다. 이 가운데 나치에 적발돼 처형된 사람은 약 1000명이다. 유다인들은 중세 후반기부터 동유럽, 특히 폴란드로 많이 이주했다. 십자군 전쟁과 흑사병 대유행 기간에 서유럽에서 쫓겨난 유다인들이 주로 찾아간 피난처가 폴란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