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내렸다.”(요나 1,1)
우리는 누구나 매일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영적 성장과 완덕을 향하여 자신의 영혼을 갈고 닦았던 이들은 이를 소명의 부르심이라 확신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그냥 흘려듣거나 혹은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 일상의 여러 삶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구약의 모세는 늘 그랬듯이 양떼를 몰고 광야로 가던 평범한 하루의 일상에서 부르심의 말씀을 듣습니다.(탈출 3,1–4) 소년 사무엘은 꿈을 꾸듯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1사무 3,4–10) 바오로 사도는 살기와 증오로 가득 찬 거친 숨을 내뿜으며 다마스쿠스로 달려가던 중에 부르심의 말씀을 듣습니다.(사도 9,1–6)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르심의 말씀을 들었을 때, 핑계를 대든가, 자신이 없는 모습을 보이거나 조금은 머뭇거리다가도 끝내는 거룩한 부르심, 그 소명에 응답하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부르심의 길이 자신으로서는 감당하기 힘들고 불가능해 보이는 캄캄하고 높은 절벽이어도, 부르신 분의 전능과 힘의 능력을 믿고 기필코 그 벽을 넘었던 믿음과 인간의 장한 의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 응답하였던 이들의 공통점은 받은 소명이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르심이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16)
주님이 우리를 택하시고 뽑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분의 거룩한 일을 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그리고 모든 부르심은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확실한 들음에서 부르심이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듣지 못한다면 소명은 따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들음’에서 다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인도 독립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1869~1948)는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이 되면, 인도의 국기를 가장 먼저 게양 할 사람은 비노바 바베(1895~1982)라고 말하였습니다. 비노바 바베는 인도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 출신임에도 열 살 때 특별한 신의 부르심을 받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며 사랑과 독립운동의 고난을 택하게 됩니다. 특별히 인도 전역을 맨발로 걸으며 사람과 짐승의 더러운 배설물을 치우고 대지주들에게 토지헌납 운동을 벌여 가난한 소작농들에게 돌려준 일은 비노바 바베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말년에 그는 죽음을 받아들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종은 주인의 명령을 기다린다. 죽음에 대해서든 삶에 대해서든 아무런 욕망이 없다. 오로지 종처럼 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다. 나는 매일 잠자리에 들면서 죽는 연습을 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이 죽을 때 해야 할 일을 오늘 하라, 즉시 하라고 말한다.”(칼린디, 「비노바 바베」, 실천문학사, 451쪽)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저 또한 살아오면서 주님의 놀라운 부르심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주님을 멀리하고 인생의 좌절과 어두움 속에서 헤매며 술에 젖어 죽음의 문턱에 있을 때, 그분은 저를 부르셨습니다. 창피하고 유치한 부르심이라도 그 부르심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면 그것은 이미 하느님의 숭고한 부르심, 소명인 것입니다.
많은 성인들이 부르심을 듣는 삶의 현장은 제각기 다릅니다. 때론 꿈을 꾸거나, 때론 죄악의 어둠 속에서, 때론 죽음의 문턱에서, 놀라운 빛 속에서 부르심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 창조의 신비인 자연의 소리에서 부르심의 소리를 더욱 확실히 듣게 됩니다.
봄에 솟아오르는 작은 새싹의 가냘픈 몸짓에서, 무서운 폭우가 그친 뒤 찬연히 떠오른 무지개의 환희에서, 아침 이슬의 영롱한 빛 속에서, 어둠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의 장엄한 일출에서, 수정처럼 맑게 흐르는 계곡의 물줄기 속에서, 번쩍이는 번개의 뇌성 속에서, 어두운 밤하늘을 찬란히 밝히는 별들의 향연에서, 슬픈 죄인의 기도에서, 성당의 거룩한 성가 소리에서 그들은, 우리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때론 그 부르심을 이해할 수 없고 감당하기 힘들어도, 심지어 달아나고 싶은 유혹과 충동이 일어 번민하고 괴로워할 때, 요나가 드디어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우리의 미약하고 부족한 믿음으로 이해할 수 없는 모든 부르심도 그분의 사랑 가득한 작은 속삭임이었다고, 모든 부르심에는 그분의 놀라운 능력과 크신 뜻이 숨겨져 있었고, 그 뜻은 한결같이 인간의 참된 행복과 구원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요나는 결국 그 부르심을 따랐던 것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최고의 축복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글 _ 배광하 신부 (치리아코, 춘천교구 영동가톨릭사목센터 관장) 만남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춘천교구 배광하 신부는 1992년 사제가 됐다. 하느님과 사람과 자연을 사랑하며, 그 교감을 위해 자주 여행을 떠난다. 현재 춘천교구 영동가톨릭사목센터 관장 소임을 맡고 있다.
삽화 _ 고(故) 구상렬 화백 (하상바오로)